제9화
김미정은 그의 품에 안겨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겠지?”
배진우는 냉소를 지었다.
“자기가 불러들인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그리고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그제야 안심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선우연이 찍소리 못한 이유는 거지들이 이미 달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리베 아카데미에서 수년간 훈련받은 탓에 아무리 많은 남자가 올라타더라도 입을 꾹 닫아야만 했다. 소리를 내면 돌아오는 건 더 잔인한 폭력이었다.
거지들의 손은 독사처럼 그녀의 몸을 휘감았고, 옷을 갈기갈기 찢으며 존엄을 짓밟았다.
선우연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유린당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가락은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배진우의 말이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자기가 불러들인 사람인데 무슨 일이 있겠어?”
마치 심장이 움켜잡힌 듯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날 밤, 선우연은 밤새도록 모욕당했다.
몸은 너덜너덜해졌고 피는 침대를 붉게 물들였다.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더러운 손길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거지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지를 추스르며 방을 떠났다.
선우연은 마치 버려진 인형처럼 상처투성이가 된 몸으로 바닥에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켜 휘청이며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놀라고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저래? 심지어 알몸이잖아.”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다리 사이에 보이는 건 설마 대장...?”
선우연은 무작정 걷기만 했다. 주위의 어떤 것도 그녀와 상관없는 듯했다.
이때, 휴대폰에 알림음이 울렸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임박했으니 얼른 탑승하라는 메시지였다.
오늘은 미리 계획해 두었던 도피의 날이었다.
조금만 더, 며칠만 버티면 되는데...
그녀는 살고 싶었다. 리베 아카데미에 있던 그 지옥 같은 세월 속에서도 희망을 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도, 영혼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순간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이젠 불가능했다. 더 이상,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한 번도 아니었다.
곧이어 배진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통화가 연결되자 쏟아진 것은 거센 질책이었다.
“이제 눈에 뵈는 것도 없어? 밤새 안 들어오고, 어디서 피해자인 척하지? 그 사람들 네가 부른 거잖아. 설마 무슨 짓을 했겠어?”
선우연은 고개를 숙이고 상처로 가득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덧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무슨 짓을 했겠냐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순간 낯선 남자들에게 밤새 유린당했다.
끔찍한 기억은 리베 아카데미에서 겪었던 참혹한 순간과 뒤엉켜 그녀의 뇌리에 깊숙이 각인되었다.
이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배진우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작작 좀 해. 오늘 내 결혼식이니까 늦지 마. 괜히 이상한 짓 하지 말고. 내가 말했지? 우리는 절대 불가능한 사이라고. 결혼식을 직접 보면 단념할 수 있을 거야.”
선우연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갈라진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다.
“네, 아저씨 앞에 꼭 나타날게요.”
그리고 전화를 끊은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호텔 옥상으로 올라갔다.
통화를 마친 배진우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선우연에게 다시 전화를 걸려는 순간 웨딩카가 호텔 정문 앞에 도착했다.
쿵!
둔탁한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추락한 인영이 보닛 위에 떨어졌다.
사방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들자 배진우의 동공이 문득 커졌다.
산산이 부서진 차량 유리 너머로 선우연의 얼굴을 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채 눈조차 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