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다음날 도우미가 의외로 유태진의 동생 유나연을 데려왔다.
이제 갓 17살이 된 소녀가 예쁘장한 얼굴로 들어오더니 소파에 가방을 내던졌다.
“박은영 어디 있어요?”
유나연은 눈을 깜빡거리며 유태진을 쳐다봤다.
“버릇없이 굴래?”
넥타이를 다 맨 유태진이 그녀를 흘겨봤다.
“오빠도 싫어하는데 뭣 하러 새언니 대접해요?”
그녀가 입을 삐죽거렸다.
전에 엄마가 말하길 박은영은 유씨 가문에 발을 들인 것 자체가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니 마땅히 이 집안을 위해서 모든 걸 헌신해야 한다고 했다.
뭐랬더라? 고급 도우미?
“말해, 또 무슨 수작이야?”
유태진은 동생을 너무 잘 알기에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정색하며 물었다.
이에 유나연은 눈알을 굴렸다.
“오빠 오늘 엄청 바쁘죠?”
“그건 왜?”
“엄마는 패션쇼 보러 가셨고 아빠는 해외에 계시고 할머니는 몸이 편찮으셔서 아무도 내 학부모 상담회에 못 와요.”
“그냥 박은영 가라고 하죠? 어차피 그 여잔 오빠한테 들러붙어 사는 한가한 사람이라 남아도는 게 시간이잖아요.”
유나연이 다리를 흔들면서 애교 조로 말했다.
“네가 직접 말해봐.”
유태진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답했다.
“있잖아요, 박은영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나한테 엄청 잘해줘요. 여우 년이 따로 없다니까요. 말만 하면 바로 오케이할 거예요.”
유나연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요즘 유나연은 서연주가 해외에서 진행한 항공 분야의 공개 강연 영상에 푹 빠져서 성적이 조금 떨어졌다.
이번 학부모 상담은 선생님과 개별 면담인데 오빠랑 엄마가 오는 건 싫고, 어차피 박은영은 만만하니 선생님께 혼나도 괜찮을 듯싶었다.
물론 박은영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오빠와 엄마에게 일러바칠 일은 없겠지.
유태진이 잠시 고민하더니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갔다.
“알았어. 은영이한텐 내가 휴가 내줄게.”
...
박은영은 아침에 일어나자 두통을 느꼈고 미열도 있었다. 요즘 그녀의 몸은 언제 어디서든 예측 불가능한 반응을 보였고 면역력과 저항력 시스템이 정상인처럼 작동하지 않았다.
어제 병가를 냈으니 오늘 마침 병원에 가서 담당 의사와 보존적 치료 방안에 대해 다시 상의할 예정이었다.
병원 로비에 들어온 그녀는 이미 두 다리에 힘이 풀렸고 몇 걸음 내디디지도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은영아!”
그녀는 한 여자의 비명을 들은 후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다시 깨났을 때 병상 옆에 절친 심가희가 앉아있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그녀를 보더니 심가희는 안쓰러운 마음에 원망을 퍼부었다.
“유태진 그 망할 자식, 대체 너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의사가 너 과로로 인한 발열이래. 이재 막 열이 내렸어.”
박은영은 행여나 자신의 병이 들켰을까 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고열에 머리가 잘못됐어?”
심가희는 놀라서 또다시 의사를 불렀다.
“저기요, 선생님!”
“아니야, 이제 괜찮아졌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니 박은영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서 얼른 그녀를 말렸다.
심가희가 모르길 망정이지, 그녀 성격에 반나절도 안 지나서 박은영의 말기 암 소식이 경운시 전체에 쫙 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할머니와 외삼촌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다.
“넌 병원에 왜 왔어?”
박은영이 묻자 심가희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등신 같은 우리 오빠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알콜 중독이 됐대. 죽었나 살았나 보러 왔지.”
“너 안색 안 좋아. 혹시 유태진 그 개자식이랑 내연녀 때문에 그런 거야?”
심가희는 진작 라이브방송을 보았는데 아직 유태진의 기혼 사실을 아는 사람이 워낙 적은지라 서연주와의 러브스토리를 예쁘게 봐주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젠장! 역겨운 것들.’
심가희가 속으로 두 남녀를 욕했다.
박은영은 멍하니 있을 뿐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나 이제 곧 이혼해.”
숙려기간이 지나면 3년간의 황당한 결혼생활을 마감한다.
심가희는 화들짝 놀라더니 제대로 오해해버렸다.
“그 새끼가 내연녀랑 살겠대?”
애초에 박은영이 유태진과 결혼할 때 꿈과 비전을 모두 포기했고 심지어 하태민이 특별 제안한 항공 연구소에 들어갈 기회까지 거절했다. 그녀는 오직 현모양처가 되어 유태진의 식사와 생활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겉만 번지르르하게 생긴 유태진 개자식을 미친 듯이 사랑했기 때문에...
이건 누가 봐도 그녀가 먼저 이혼을 언급한 상황이 아니다. 유태진에게 차인 게 뻔하지 뭐.
다만 박은영이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먼저 말했어.”
심가희는 입을 쩍 벌리고 있다가 냅다 박수를 쳐댔다.
“그렇지! 잘했어, 아주 잘했어. 너처럼 훌륭한 애가 웬 사랑 타령이니? 다 제쳐두고 커리어나 쌓아야지. 로열 그룹 때려치우고 비전에 와서 네 기술 성과를 자본으로 우리 기업에 투자하는 건 어때?”
비전 기업은 혁신 과학 기술 회사로서 첨단 드론을 주로 개발하는데 심가희가 주요 주주 중 한 명이다. 그녀는 전문적인 지식은 전혀 없지만 어릴 적부터 공부에 아예 관심이 없고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진리만 꿰차고 있다.
그건 바로 영앤리치에 과감하게 투자한다는 것이다.
박은영은 ‘비전 기업’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창백한 얼굴에 은근한 열정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