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현관 앞에 놓여 있던 커플 슬리퍼가 사라졌고 그 자리에 있는 건 하이힐 한 켤레와 심수혁의 생일날 주소민이 선물했다던 명품 구두였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이 집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심수혁과 주소민일 것이다.
‘두 사람 분명히 이틀 뒤에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아직 상황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을 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누군가 성큼 다가왔다. 주소민이었다.
그녀는 내 슬리퍼를 신고 내 잠옷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어깨에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 마치 이 집 주인인 양 나를 바라봤다.
“희연 씨,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아직 퇴근 시간 안 됐잖아요?”
그녀는 능청스럽게 포도 한 알을 입에 넣더니 포도씨를 퉤 뱉어 컵 안에 담았다.
그런데 그 컵은 내가 예전에 너무 아껴서 손에서 놓지 않았던, 심수혁이 커플용으로 사준 내 물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쓰레기통처럼 쓰이고 있었다.
그때 거실 쪽에서 심수혁도 걸어 나왔는데 분명히 주소민이 내 컵을 쓰레기통처럼 쓰는 걸 봤을 텐데 못 본 척했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당황한 듯 표정이 살짝 굳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출근 안 했어?”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했다.
“서희연, 네가 내 아내라도 그렇지, 너무 자주 무단 조퇴하는 거 아니야?”
“거긴 회사야, 우리 집이 아니고. 네가 이렇게 규칙 안 지키면 내가 직원들한테 어떻게 말해.”
‘규칙?’
그 말에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규칙 안 지키는 걸로는 당신이 1등 아니었나?’
불과 1년 전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심수혁은 경력 하나 없는 주소민을 관리직으로 특채했다.
물론 나는 의심스러웠지만 그는 주소민은 발전 가능성이 있다며 나를 설득했고 나도 그 말에 넘어가 그녀에게 직접 업무를 하나하나 가르쳤다.
하지만 주소민은 매일 출근해서 화장만 하거나 엎드려서 잤고 일하는 시간에 농땡이만 피웠을 뿐만 아니라 일부러 새벽까지 회사에 남아 야근 인증샷을 단톡방에 올리는 게 일과였다.
내가 이 문제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지만 심수혁은 그럴 수도 있는 거라며 웃어넘겼다.
그리고 내가 CCTV를 설치하자는 말엔 그렇게 하는 건 불법이라며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프로젝트는 연이어 실패했고 회사는 수십억 원을 날렸다. 그래도 주소민은 개선되지 않았고 내가 더는 못 참겠어서 정리하자 했더니 오히려 심수혁이 화를 냈다.
“너 혹시 질투하는 거야? 소민이가 너보다 일 잘해서?”
결국 주소민은 남았고 내 클라이언트와 내 프로젝트를 하나둘 뺏어갔다. 심수혁은 그걸 보면서도 모른 척했고 오히려 주소민이 유능하다며 나를 질투에 눈먼 꼰대처럼 몰아갔다.
처음엔 억울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런 인내심이면 나는 어느 회사에 가든 잘 버텼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그런 가치를 이런 사람들한테 썼다는 거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소민이 다정하게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희연 씨가 오빠 귀국한 거 알고 일부러 온 거 아닐까요?”
심수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 다음에는 이러지 마. 그런데 너 우리가 돌아온 거 어떻게 알았어?”
“귀국 비행기표는 인사팀에서 끊어준 거잖아요. 아마 인사팀에서 희연 씨한테 말했을 수도 있죠.”
“서희연, 너 평소에 일은 대충 하면서 이런 쓸데없는 건 잘도 챙기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런다고 내가 널 용서할 줄 알아? 카드 정지시켜서 날 파트너들 앞에서 망신 준 거, 결국 소민이가 돈 구해서 겨우 해결했어.”
“용서를 받고 싶으면 먼저 사과부터 해.”
“요즘 소민이가 살던 집 리모델링 중이라 일단 이 집 방 하나 비워서 소민이가 지낼 수 있게 해. 그러면 이번 일은 넘어가 줄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집, 이미 팔았어.”
“뭐?”
심수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보다 먼저 주소민이 입을 열었다.
“혹시... 희연 씨가 이 집 팔아서 더 좋은 집 사서 오빠한테 사과의 의미로 주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심수혁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이 집에서 오래 살기도 했고 이참에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자. 비용은 나도 좀 낼게. 그러니까 소민이가 당분간 지낼 수 있게 이 집은 일단 팔지 마.”
“그럼 제가 임대료는 낼게요. 시세대로요.”
“무슨 임대료야?”
심수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네 상사인데 임대료까지 받겠냐?”
“그래도 드려야죠. 너무 민폐잖아요.”
“그럼... 몇만 원만 줘.”
둘은 무슨 콩트 찍듯 말을 주고받으며 즐거워했다.
이 집은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고급 아파트라 시세대로라면 월세가 몇백만 원 가까이 할 것이다.
그런데 심수혁은 예전에 데이트할 때도 영화 티켓이나 식사비까지도 정확히 절반씩 계산하던 사람이었다.
‘사랑받는 사람과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란 이런 거구나.’
“어때? 네가 동의하면 이혼 얘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게.”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시 생각할 필요 없어.”
“안 되지. 그렇게 쉽게 넘어가면 네가 또 버릇 나빠지잖아. 이참에 정신 좀 차려야...”
심수혁은 내 말을 가로챘고 표정을 보니 아직도 내가 이혼을 반대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그 옆에 있는 주소민이 히히 웃으며 거들었다.
“오빠 말이 맞긴 한데 그래도 제 체면 봐서 희연 씨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오빠랑 희연 씨가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지금 와서 이혼이라니 너무 아깝잖아요.”
심수혁은 대답 대신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그러자 주소민은 아예 그의 팔에 손을 얹고 살살 흔들며 애교를 부렸다.
“아, 하지 마.”
입으로는 귀찮다는 듯 말했지만 심수혁의 입꼬리는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씩 웃었다.
“그래, 알겠어.”
그제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흡족하게 말했다.
“소민이까지 네 편을 드는데 이번 한 번은 봐줄게.”
“너 소민이한테 잘 해야 해. 네가 그렇게 했는데도 예전 일 다 잊고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어딨어?”
“됐고, 그럼 이번 이혼은 그냥 없던 일...”
“당신 내 말을 오해했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이번엔 내가 끊었고 이혼 서류를 그의 앞에 내밀며 말했다.
“우린 이미 이혼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