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차 안에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권예진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호열 씨, 볼 일이 있어 그러는데 앞쪽 버스 정류장에 내려줄 수 있을까요?”
공호열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짜증을 내면서 비꼬았다.
“촌뜨기 주제에 해경으로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볼 일은 무슨.”
버스 정류장이 바로 앞에 있었고 조금만 더 가면 백화점이었다.
조금 전 쇼핑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혼자 실컷 쇼핑하려고 볼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댄 거라고 생각했다.
권예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말투에 분노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호열 씨는 호열 씨가 할 일이 있고 시골에서 올라온 촌뜨기도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래도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네.”
공호열은 비웃으면서 운전석에 앉아 있는 정민욱에게 말했다.
“저 앞에 버스 정류장에서 차 세워.”
“알겠습니다.”
...
청림대학교는 세계 랭킹 10위 안에 드는 명문대학교로 주변 환경이 조용하고 학구열이 높았다.
권예진은 학생들에게 물어본 후에야 의과대학 학장실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학장님.”
권예진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원래는 좀 더 일찍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늦어졌어요.”
양문수는 직접 권예진에게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
“예진 씨 사부님은 건강하시지? 훌륭한 스승 밑에서 훌륭한 제자가 나온다고 하잖아.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오늘 이렇게 와줘서 정말 영광이야. 해경시에서 쭉 발전할 계획은 있어?”
“사부님 아주 건강하십니다. 해경시에 오면 꼭 학장님을 찾아뵈라고 신신당부하셨어요.”
권예진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해경시에 오래 있을 것 같아요.”
여자는 자기만의 일을 해야 했다. 설령 공호열과 결혼한다고 해도 가정주부가 될 생각은 없었다.
“잘됐네. 그 훌륭한 의술을 썩혀선 안 되지. 우리 의과대학에서 일해볼 생각은 없어?”
양문수는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그건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한서 의학 회담이 끝난 다음에 다시 생각해볼게요.”
“그래.”
양문수는 권예진에게 서류 봉투 하나와 편지 봉투 하나를 건넸다.
“회담 자료인데 가져가서 한번 봐. 다른 의견이나 건의사항 같은 게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줘. 그리고 이건 회담 초대장이야. 꼭 참석해서 지도해줬으면 좋겠어.”
권예진은 서류 봉투와 편지 봉투를 받았다.
“자료는 보도록 할게요. 근데 그날 참석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 드릴 수 없네요.”
그녀는 볼 일을 마치고 학장실을 나섰다. 오아시스로 돌아가도 할 일이 없어 캠퍼스를 둘러보았다.
대학교에 온 게 처음이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캠퍼스답게 멀지 않은 곳에서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다.
그녀는 멀리서 잠깐 구경할 뿐 가까이 가진 않았다. 목적지 없이 길을 따라 걷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맑고 청량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권예진?”
권예진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얼굴의 소년이 선글라스를 끼고 흰 셔츠와 청바지 차림으로 서 있었다.
셔츠 윗부분의 단추 세 개가 풀려 있어 쇄골과 하얀 피부가 드러났고 소매를 몇 번 접혀 가느다란 손목이 보였다. 그는 나른한 자세로 커다란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저를 아세요?”
권예진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소년은 선글라스를 벗고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권예진, 나 기억 안 나?”
소년의 두 눈에 실망감이 스치더니 일부러 권예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헝클어뜨렸다.
“나 정우현이야. 이제 생각나?”
정우현은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권예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우현?”
권예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키가 이렇게 컸어? 게다가 엄청 잘생겨졌네. 몇 년 사이에 성형이라도 한 거야?”
“누가 성형했다고 그래?”
정우현은 그녀를 흘겨보았다.
“나 원래 잘생겼거든? 어렸을 땐 몸이 안 좋아서 마른 거고.”
열세 살 때 정우현은 희귀한 면역 체계 질병에 걸려 여러 병원을 다녔지만 모두 고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그녀 사부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씨 가문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를 도교 사원에 보냈다.
그렇게 도교 사원에서 2년 동안 생활했고 병이 다 나은 후 부모님은 그를 데려갔다. 그 후로 그들은 연락이 끊겼는데 오늘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정우현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점심시간인데 어디 가서 밥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할까?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엄청 많아.”
“그래.”
마침 권예진도 배가 고팠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권예진은 정우현의 차를 타고 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누면서 정우현이 지금 유명한 스타가 되었고 오늘은 촬영 때문에 청림대학교에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넌 지금 뭐 하고 지내? 청림대학교에서 애들 가르치고 있어? 선생님 참 좋지. 대학교는 힘들지도 않고 방학도 있고.”
정우현은 권예진의 의술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해 13살 동갑이었던 권예진이 침을 놓아주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해서 선생님이 되긴 힘들어.”
권예진이 말했다.
“오늘은 그냥 자료를 가지러 왔어.”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 배우한테 연기력이 중요한 것처럼. 넌 어렸을 때부터 청진 도사님 밑에서 의술을 배웠고 한의학에도 능통하니까 충분히 수준 높은 학술 논문을 발표할 수 있을 거야. 네 실력이라면 청림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도 아까울 정도야.”
그 시각 레스토랑 창가 쪽 테이블.
한 여학생이 스테이크를 썰고 있던 공지율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지율아, 저기 봐봐. 저 사람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 정우현 아니야?”
“아닐 거야. 지금 청림대에서 촬영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여기 나타나.”
공지율은 고개도 들지 않고 스테이크를 썰면서 재촉했다.
“빨리 먹기나 해. 레스토랑에 도시락 포장해달라고 했어. 이따가 우리 우현이한테 갖다 줘야 한단 말이야. 촬영장 밥이 맛없어서 우현이 입에 안 맞을 거야.”
“한번 봐봐. 진짜 정우현인 것 같아.”
여학생이 다시 한번 말하자 공지율은 그제야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레스토랑 안으로 나란히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본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여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황급히 휴대폰을 꺼내 카톡 대화창에서 사진 한 장을 열었다.
“저 여자...”
‘쟤가 왜 우현이랑 같이 있어? 할아버지가 아픈 걸 빌미로 사촌 오빠를 협박해서 결혼을 강요하더니 밖에서는 남자한테 꼬리 치고 다녀? 심지어 그 상대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우리 우현이라고?’
옆에 있던 여학생이 물었다.
“쟤 촌뜨기 아니야? 근데 정우현을 어떻게 알아? 게다가 둘이 엄청 친해 보이는데.”
“우리 오빠가 저런 촌뜨기랑 아는 사이일 리가 없잖아. 쟤가 껌딱지처럼 들러붙은 거겠지.”
공지율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음흉하게 웃더니 방금 찍은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