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한편 권예진은 정우현과 함께 2층 룸으로 향했다. 룸에 들어간 후 정우현은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고 음식을 주문했다.
“나왔어요.”
식사를 마친 권예진이 룸 문을 열고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카메라와 마이크를 든 기자들이 떼로 몰려들어 그들을 에워쌌다.
권예진은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에 눈이 부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가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정우현이 그녀를 뒤로 감쌌다.
한때 병약하고 허약했던 소년은 어느새 키가 크고 훤칠해져 비바람을 막아주는 큰 나무처럼 든든했다.
정우현은 이런 상황이 익숙했지만 그녀는 처음이었다.
기자들이 쉴 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정우현 씨, 이 여성분과는 무슨 관계인가요? 데이트 중이신가요?”
정우현은 침착하게 대답하면서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데이트 아닙니다. 그냥 친구와 점심을 먹으면서 회포나 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희가 알기로 정우현 씨가 이성과 단둘이 식사한 게 이번이 처음인데 혹시 전 여자친구와 다시 만나신 건가요?”
“두 분 얼마 동안 교제하셨나요? 여성분을 인터뷰해도 될까요?”
기자들이 무섭게 몰아붙였고 특종을 잡아야 한다는 집념이 가득했다.
“안 됩니다.”
날카로운 질문들이 쏟아졌지만 정우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가 권예진을 돌아보자 권예진은 바로 알아채고 룸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복도와 격리된 순간 온 세상이 조용해진 듯했다.
정우현이 기자들에게 하는 말들이 어렴풋이 들렸다.
“제 친구는 연예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평범한 친구일 뿐이니 지나친 관심은 자제해주시고 제 친구의 삶을 방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우현의 기사가 인터넷에 도배되었다.
[인기 배우 정우현 열애설.]
[정우현, 미모의 여성과 데이트.]
[정우현, 여자친구가 일반인이라 밝히며 지나친 관심 자제 당부.]
자경 그룹 대표 사무실.
공호열은 가죽 소파에 앉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뽐내면서 뼈마디가 뚜렷한 손가락으로 기사를 클릭했다. 그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옆에 있던 정민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홍보팀에 연락해서 기사를 내릴까요?”
“필요 없어.”
공호열이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도통 가늠할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소문을 잠재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문이 존재하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지금 덮으려 한다면 오히려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할 거란 말이야.”
정민욱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사람을 보내서 권예진 씨를 모셔올까요?”
공호열이 되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건...”
대표의 속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던 정민욱은 말을 잇지 못했다. 공호열이 싸늘하게 말했다.
“자기가 만든 스캔들이니까 알아서 해결하라고 해.”
그러고는 속이 뒤집히는 기사를 쳐다보기도 싫은 듯 휴대폰을 책상 위에 던져버렸다.
‘어제는 결혼을 강요하더니 오늘은 열애설이야? 이 여자의 능력을 너무 과소평가했어. 아직도 놀랄만한 일이 얼마나 더 있는지 궁금하네.’
정우현 매니저의 도움을 받고서야 권예진은 겨우 레스토랑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정말 미안해. 밥 한 끼 때문에 기자들이 몰려들 줄은 몰랐어.”
정우현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한테 피해가 가는 건 아니겠지?”
권예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세 사람은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정우현이 조수석 문을 열고 권예진을 보며 매너 있게 말했다.
“타. 지금 어디 살아? 내가 데려다줄게.”
“그게...”
권예진은 잠시 망설였다. 부당한 방법으로 오아시스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왠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제작진들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얼른 가서 촬영해. 난 택시 타고 가면 돼.”
그녀는 손을 흔들어 인사한 다음 서류 봉투를 들고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선 그때 짙은 화장을 한 소녀들과 건달 같은 남자 세 명이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
길에 사람이 있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지만 남자들은 손에 밧줄을 들고 있거나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들도 각기 다른 물건을 들고 있었다.
권예진은 뒤를 힐끗거리면서 불안한 마음에 서류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김씨 가문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순순히 물러설 김다윤이 아니었다.
그 가능성에 권예진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골목 끝으로 달려가려 했다. 그런데 몇 걸음 옮기기도 전에 골목길 반대편에서 남자 셋과 여자 둘이 걸어 나왔다.
앞뒤로 길이 막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맨손으로 여러 명을 당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정면돌파는 피하고 머리를 써야 했다.
권예진이 침착한 말투로 물었다.
“누구야? 원하는 게 뭐야?”
“얼굴은 좀 반반하네.”
건달은 음흉하게 웃으면서 권예진을 훑어보았다.
“얼굴만 믿고 감히 내 남편한테 꼬리를 쳐?”
한 소녀가 접이식 과도를 펼치자 은색 칼날이 햇빛에 반사되어 날카로운 빛을 뿜어냈다.
“얼굴을 아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줄게.”
“오해한 것 같은데 난 그쪽 남편이 누군지 몰라.”
권예진이 급히 물었다.
“남편이 누군데?”
“정우현. 내 남편은 정우현이야.”
권예진은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소녀를 보며 넋을 놓았다.
‘나 지금 극성팬을 만난 거야?’
그 시각 공지율은 멀지 않은 곳에 숨어 상황을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 사진을 팬 카페와 기자들에게 보낸 후 모든 게 그녀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기자들의 폭로 기사가 쏟아졌고 팬들도 가만히 있지 않고 권예진을 포위했다. 오빠에게 사진을 보내는 것보다 더 효과가 있었다.
건달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고 일단 잡아다가 우리끼리 실컷 즐기는 게 어때?”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달들이 몽둥이와 밧줄을 들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순순히 협조하면 덜 힘들 거야.”
권예진은 약한 척하면서 웃었다.
“그래.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지. 시키는 대로 할게.”
“그래도 눈치는 있네. 이따가 많이 예뻐해 줄게. 황홀한 게 뭔지 알려줄 테니까 기대해.”
건달들은 음담패설도 서슴없이 늘어놓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경계를 많이 늦추었다.
권예진은 기회를 엿보다가 한 건달의 발가락을 힘껏 짓밟고는 틈을 타 쏜살같이 골목 입구를 향해 달렸다.
“잡아. 절대 도망치게 해선 안 돼.”
건달들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몽둥이를 들고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