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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남자는 하나같이 믿을 게 못 돼

가는 길 내내, 주시완은 어린 시절 셋이 함께 보냈던 수많은 추억을 줄줄이 쏟아냈다. 하지만 강태훈의 귀에는 단 한 마디도 들어오지 않았고 그의 시선은 유리창 너머로 흐릿하게 지나가는 도시의 풍경에만 머물러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자, 강태훈은 작별 인사 한마디 없이 그대로 전용 엘리베이터로 발걸음을 옮겼고, 곧장 위층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그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비서가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대표님, 국진 그룹의 특허 침해 소송 건 관련해서요. 상대측에서 국제적으로 유명한 변호사를 선임했다고 합니다. 추가로 변호사를 더 붙이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요.” 강태훈은 무심한 듯 금테 안경을 살짝 고쳐 쓴 뒤, 펜을 들어 서류 하단에 사인을 하며 태연하게 답했다. “필요 없어. 법무 쪽은 허 변호사가 복귀하면 전부 넘길 거야.” “허 변호사께서 본사로 복귀하시는 건가요?” 방금 전까지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비서의 표정이, 그 한마디에 환하게 밝아졌다. “그럼 정말 다행이네요! 이번 소송은 국진이 백프로 지겠는데요.” 그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동안 회사를 상대로 제기된 굵직한 소송들 가운데, 허수정이 변호인으로 나선 사건은 단 한 건도 패소한 적이 없었다. 비서는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했지만 강태훈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불러 세웠다. “잠깐. 과일하고 영양제 좀 사서 성진병원 VIP 1번 병실에 보내.” “알겠습니다, 대표님.” 비서가 퇴장한 뒤, 강태훈은 서재 한쪽에 걸려 있던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아까 막 발급받은 혼인신고서를 꺼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진 위를 손끝으로 쓸어내리듯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금고를 열고 그 서류를 단정하게 넣었다. 한편, 병원 안은 여전히 곳곳에서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퍼져 있었다. 하윤슬은 병실에서 무려 두 시간이 넘도록 기다린 끝에야, 정선희의 의식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이번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해 보여 팔을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은 있는 듯했다. “엄마, 깼어요? 아까 의사 선생님이 다녀가셨는데 수술 동의서는 내가 전부 사인했어요. 며칠 내에 바로 수술 들어갈 수 있대요!” 하윤슬은 그 서류에 사인하던 순간, 감격에 겨워 펜을 쥔 손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하지만 정선희는 깊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술비는 어디서 났니?” “빌렸어요...” 하윤슬은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빌렸다’는 말이 전혀 거짓인 것도 아니었다. 지금은 강태훈의 돈을 쓰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갚을 생각이었으니까. “몇억은 들 텐데 누가 그런 큰돈을 빌려줘?” 정선희는 당장이라도 몸을 일으킬 듯, 격앙된 목소리로 되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그 돈, 무슨 수로 마련했어? 어디 나쁜 짓이라도 한 거야?” “아니에요, 엄마!” 더는 감출 수 없다고 느낀 하윤슬은 고개를 푹 떨군 채, 조용히 말했다. “나... 남자친구가 있어요. 그 사람이 빌려준 거예요.” 그 말을 듣자마자 정선희는 눈이 뒤집힌 듯 손을 휘저으며 소리쳤다. “안 돼! 엄마 이 수술 안 할 거야. 당장 그 돈 돌려줘!” 하윤슬은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리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이번에도 수술 안 하면 정말 위험하단 말이에요. 목숨이 달린 문제라고요!”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남자 돈은 안 쓸 거야! 엄마가 너 어릴 때부터 뭐라고 했니? 남자란 놈들 하나같이 다 못 믿을 것들이라고,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했잖아! 특히 돈 많은 놈들은 더더욱 안 돼!” 정선희가 그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결혼 전에는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던 남편이 결혼한 지 겨우 2년 만에 그녀를 배신했다. 그것도 모자라 외도에다 심지어 사생아까지 있었으니, 남자에 대한 불신은 뿌리 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하윤슬도 더는 참지 못하고 결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아빠라는 사람은 거의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엄마까지 잘못되면 나 혼자 남아서 어쩌라고요. 나 진짜 고아 되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요?” 그 말에 정선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하윤슬은 입을 달싹이다 조용히 어머니의 손을 감쌌다. “엄마, 약속할게요. 나 그 돈은 꼭 갚을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우선 수술부터 받아요. 네?” 애초에 계약 결혼이 끝나기 전, 정확히 그 1년 안에 하윤슬은 반드시 그 돈을 전부 갚아낼 거라고 처음부터 마음속으로 단단히 다짐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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