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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낯선 번호

딸아이의 얼굴에 완연히 드리운 피곤한 기색을 본 정선희는 끝내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다 엄마가 못나서 너까지 고생시키는구나.”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언제나 딸에게 남자에 대한 공포심만을 심어주는 게 옳지 않다는걸. 언젠가는 시집도 가야 할 텐데, 혹여 자신처럼 잘못된 선택으로 깊은 상처를 안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엄마,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수술만 잘 되면 곧 침대에서도 일어나 걷게 될 수 있다고 했어요. 나, 엄마가 해준 만두가 너무 먹고 싶어요. 그러니까 꼭 나아야 해요.” “그래, 그래. 알았다.” 정선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웃었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래서 말인데 너, 남자친구 있다고 했지? 한번 데려와 봐. 나도 한 번쯤은 보고 싶구나.”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멍해진 하윤슬은 얼떨결에 시선을 피하며 탁자 위에 있던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 요즘 좀 바빠서요. 회사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네 아버지도 그랬지...” “엄마, 세상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잖아요.” 하윤슬은 그렇게 말했지만 정선희에게 그건 그저 남자 편을 드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다시 등을 돌린 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창밖에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제 어머니 곁에는 간병인이 있어 밤사이 큰 걱정은 없었고 내일 아침 일찍 출근도 해야 했기에 정선희가 잠든 뒤, 하윤슬은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녀는 뭔가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택시를 세워 탔고 강태훈이 알려준 그 주소를 향해 출발했다. 도착하자마자 가방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을 꺼내 확인하니 낯선 번호가 떠 있었다. 전화를 받자 익숙한 목소리가 전해졌다. “도착했어요?” “네, 도착했어요.” “여기 갑작스럽게 접대 일정이 잡혀서... 아마 나중에나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먼저 들어가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JH0825에요.” 숫자를 듣는 순간, 그녀는 손이 허공에 잠시 멈췄다. 신발을 벗고 현관을 들어서며, 그녀는 다시 그 숫자를 곱씹었다. ‘0825...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숫자였구나.’ 강태훈은 아직도 그 문신을 지우지 않았고 비밀번호조차 바꾸지 않았다. 그것만 보아도 그는 아직도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증거였다. ‘결혼 상대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 그저 그 여자를 자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바로 강주하의 입에서 언급된, 여전히 그의 마음속을 차지하고 있을 ‘그 여자’, 허수정이었고 그 두 이니셜만으로도 충분히 명확한 힌트였다. 하윤슬은 자신의 감정을 자신도 정의할 수 없었지만 단 하나만은 분명했다. 지금의 자신은, 그저 대체품일 뿐이라는 사실이었다. 외투를 벗고 일을 시작하려 컴퓨터를 켜려던 그 순간, 현관 옆에 놓인 커다란 비닐봉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 속에 들어 있던 건 강태훈의 비서가 보냈다는, 콘돔 한 봉지였다. ‘대체 이걸 이렇게 대놓고? 하나 둘 셋... 열 박스는 훌쩍 넘겠는데.’ 붉고 푸른 상자들이 가득한 그 봉지를 보며 하윤슬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헛기침 몇 번으로 당황을 감추며 그 자리를 피했다. 그때였다. 회사 메신저가 울리며 강주하가 보낸 메시지 창이 반짝거렸다. [전화할 때 옆에서 들린 남자 목소리, 누구야?] [병원 의사 선생님이야.] 하윤슬은 더 이상의 설명 없이 짧게 답했다. 굳이 떠벌릴 일도 자랑할 일도 아니었고 어차피 계약 결혼은 1년뿐이었기에 자신만 조용히 감추면 그뿐이었다. 그녀는 이내 업무 파일을 열고 하영 그룹의 프로젝트 자료를 하나씩 검토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현관 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윤슬이 다가가 인사라도 하려던 찰나, 키 크고 날렵한 실루엣이 거침없이 그녀를 밀어붙이며 거실 벽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는 짙은 술 냄새와 함께 거친 키스가 그녀를 덮쳤다. “대표님! 제발 여긴 안 돼요, 제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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