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0장 밥을 먹어야 그림을 그릴 힘이 나지
“내가 집들을 별장으로 옮기는 김에 서예를 다치게 할 수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서예를 안고 있어.”
서이준은 차에서 내리며 말을 하던 동시에 여자아이의 얼굴을 문질러댔다.
여자아이는 눈을 반짝거리며 선물을 손에 들어 서이준에게 건넸고 서이준은 웃음을 터뜨리며 손에 들었다.
침 범벅이었다.
민서희는 서예의 침을 닦아주었다.
“먼저 들어가요. 나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래.”
서이준은 짐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고 민서희는 주위를 둘러봤더니 경치가 꽤나 좋아 보였다. 전에 독일에서 거주했던 환경이랑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서예가 적응하지 못할 리가 없어 보였다.
서이준은 늘 이런 세심한 것을 잘 챙기는 사람이었다.
품속에서 얌전히 지내고 있던 서예는 갑자기 다리를 흔들며 내려가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공원 의자 옆에 앉힌 민서희는 당부를 했다.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막 돌아다니지 마.”
서예는 힘껏 고개를 끄덕거렸고 민서희가 막 손을 놓자마자 서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으로 기어갔다.
마침 그린벨트라 머리를 박게 되자 민서희는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나뭇가지는 없었고 그저 연한 풀뭉치였다.
“서예야! 괜찮아?”
그녀는 긴장한 듯 조심스레 서예를 끌어안았고 서예의 다른 한 손은 놀랍게도 한 책가방 끈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있던 박수호는 멍하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었고 널브러진 가방은 마침 서예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민서희는 여기 풀뭉치에 남자아기 하나가 숨어 있을 줄은 발견도 못 했을 테니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주저앉은 민서희는 혹시나 길을 잃은 이웃집 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가야, 왜 여기에 있어? 부모님은?”
박수호는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고 품에 있는 아기는 그를 대신하기라도 하는 듯 낑낑거렸다.
민서희는 이 남자아기가 어딘가 남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다봤더니 안에는 모두 그림물감이었고 그중 한 그림을 꺼내 손에 들자 입이 떡 벌어졌다.
하늘 천지에 별들과 색감들이 번져 그림 전체가 빛을 발산하는 것만 같았고 붓을 잘 사용해서인지 남다른 천재적 재능을 분출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성하 밑에는 어른 두 명과 한 아기가 서 있었다.
이상한 점이라면 어른 두 명은 아기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유달리 고독해 보이기만 했다.
민서희는 순간 이 아기가 사랑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이게 다 네가 그린 거야?”
박수호는 그녀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민서희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주 예뻐서 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본 적이 없는데 나한테 선물할 수 있어? 나한테 선물하면 그 보상으로 밥을 차려줄게.”
박수호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고 민서희는 그의 품 안에 있는 강아지를 가리켰다.
“네가 배고프지 않다고 해도 이 강아지는 뭘 먹어야 할 거 아니야? 엄청 여위였는데 불쌍하잖아.”
그 말에 박수호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는 표정에 변화가 없으나 자그마한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떨고 있었다.
바로 그때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귀여운 화가야. 밥을 잘 챙겨 먹어야 그림을 그릴 힘이 나지? 안 그래?”
가늘고 아름다운 그 손에는 살빛이 붉어 정성스럽게 초대를 하는 것과도 같았다.
박수호는 귀신에 곡한 듯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더니 엄청 따뜻했다.
민서희가 풀숲에서 그를 뜰어내고 있을 때 서이준이 마침 다가왔고 민서희가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