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나는 멍하니 넋 놓은 채 박윤성의 사무실을 나섰다. 200억 배상금에서 헤쳐나오지도 못했는데 그가 국제회의가 있다며 휴식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싫다고 하니 주성현을 시켜서 나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기억을 잃어서 몇 년 동안 그와 어떤 방식으로 지내왔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요 이틀 함께 지내면서 이 남자가 얼마나 강압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항상 높은 자리에 있어서인지 매사에 거만한 태도로 임했고 나와 대화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앞에서 거절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본인 결정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 200억이라는 숫자에 멍해진 채 사무실 복도를 걷던 중 가녀린 체구의 누군가와 부딪쳤다. 사과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쌤통이다.” 아주 익숙한 여자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은하?” 나는 놀란 눈빛으로 적의에 찬 그 여자를 바라봤다. 한편 소은하는 내가 대뜸 이름을 부르니 복잡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좀전의 적대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상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누가 너보고 그렇게 부르래?” 그녀가 투덜거렸다. 표정은 여전히 일그러졌지만 이전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소은하가 너무 반가웠다. “너도 만현 그룹에서 일해?” 소은하는 나의 대학 동기였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아름다운 외모, 늘씬한 키를 가진 차도녀지만 친해지고 보니 성격이 좋고 의리도 있었다. 과거에 따돌림을 당했던 경험 때문인지 늘 차가운 인상을 주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그녀를 싫어했다. 나도 그녀와 지내고 나서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게 됐다. 기억을 잃은 나는 불안했고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익숙한 사람을 만나자 너무 감격스러웠다. 다만 소은하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 여기서 5년째 일하고 있는데 뭘 그렇게 놀라?” 나는 숨을 크게 쉬고 주성현을 힐끗 본 후 감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미안. 요즘 감정 기복이 좀 심해서...” 그 말에 그녀는 더욱 놀란 듯 날 쳐다봤다. 주성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