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집에 도착한 허소원이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을 때 휴대폰이 문득 울렸다.
얼른 확인해보자 딸의 영상통화였다.
그녀는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곧이어 화면에 가은의 얼굴이 나타났다.
통통한 볼살은 마치 인형을 연상케 했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커다란 눈망울, 토끼 잠옷까지 입은 모습은 귀여우면서 사랑스러웠다.
가은은 졸린 얼굴로 눈을 비볐고 목소리에 애교가 묻어났다.
“엄마, 오늘 밤은 왜 저한테 잘 자라는 연락이 없어요?”
표정은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딸을 보는 순간 짜증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이내 재빨리 사과했다.
“미안, 수술이 끝나면 바로 전화하려고 했는데 급하게 고객을 만나 약재 구매 건에 관해 얘기 하느라 늦었어. 지금 막 집에 도착했어.”
바쁘게 일하는 엄마를 보자 속상했던 마음이 어느덧 온데간데없어졌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허소원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야. 우리 가은이가 잘 먹고 잘살 수만 있다면 하나도 안 힘들어.”
엄마의 위로에 가은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크면 제가 돈을 벌어서 호강시켜드릴게요.”
“그래? 얼른 어른이 되려면 매일 많이 먹어야겠네?”
모녀는 한참을 수다를 떨었고 허소원은 마침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앞으로 박태진과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 오늘 밤은 개한테 물린 셈 치기로 했다.
이내 머릿속에서 지우고 샤워를 마치고 자러 갔다.
...
한편, 박태진도 집에 도착했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박은성은 아직 깨어 있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손가락으로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렸다.
모니터에는 허소원의 정보가 표시되었다.
녀석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곧이어 아빠를 발견하자 잽싸게 웹페이지를 닫고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수상한 행동을 눈치챈 박태진은 짐짓 엄한 어조로 말했다.
“늦은 시간까지 안 자고 뭐 해? 게임 하니?”
박은성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자료 찾던 중이었어요. 이제 잘 거예요.”
그러고 나서 노트북을 닫고 소파에서 내려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단추를 풀고 있던 박태진은 아들을 내려다보더니 무심하게 말했다.
“그래, 잘자.”
이내 옷깃이 벌어지자 쇄골의 이빨 자국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옆을 지나가던 박은성이 걸음을 우뚝 멈추고 총기가 넘치는 눈동자로 쇄골을 응시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 아들을 보자 박태진이 물었다.
“왜?”
박은성은 불쾌한 표정으로 쇄골에 생긴 이빨 자국을 가리켰다.
“또 여자랑 놀아난 거예요?”
박태진은 말문이 막혔다.
여자랑 놀아나다니?
이내 허리를 숙여 아들의 말캉한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빠 일 끝나고 방금 왔어.”
박은성의 목소리가 차갑기 그지없었다.
“일하러 갔다는 사람한테 이빨 자국이 웬 말이죠? 요즘은 몸이라도 깨물어야 사업이 성사되나 봐요?”
박태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었다.
“아니... 이건 앙큼한 여우한테 물린 거야.”
이런 허술한 변명에 어찌 속아 넘어가겠는가? 박은성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여우 같은 년은 아니고?”
녀석의 표정에 불신이 가득했다.
부자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는 정시훈은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뺐다.
누가 봐도 여우 같은 여자이지 않은가?
비록 과정을 직접 목격한 건 아니지만 어떻게 생긴 이빨 자국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전처를 만나자마자 본론부터 들어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방을 잡는 것도 모자라 이빨 자국까지 남기다니?
정시훈이 엉뚱한 오해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는 박태진은 아들의 말대꾸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어쨌거나 원흉인 허소원은 ‘여우’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키스하는 순간 몽롱한 눈빛과 요염한 표정은 매혹 그 자체였다.
먼 옛날 한 나라를 망하게 하는 절세미인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았다.
물론 아들한테는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었다.
박태진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어른들의 일은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잠이나 자.”
헤어스타일이 엉망진창이 되자 박은성은 욱하는 마음에 발끈하며 외쳤다.
“물론 아빠한테 왈가불가할 입장은 아니지만 새엄마를 찾기 위해서는 제 동의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말했죠? 만약 귓등으로 듣다가는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씩씩거리며 방으로 걸어갔다.
박태진은 눈살을 찌푸린 채 제 자리에 서 있었고, 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나이는 어린데 성격이 얼마나 까칠한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화를 돋우었다.
앞으로 집안 어른들에게 너무 오냐오냐 키우지 않도록 당부해야 할 듯싶었다.
이제 버르장머리도 없을 정도라니.
한편, 방에 돌아온 박은성은 여전히 뾰로통해 있었다.
비록 아빠가 함부로 행동하는 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새엄마가 되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근하려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사람을 엄마로 받아들일 바에는 본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찾는 게 나았다.
이내 머릿속으로 병원에서 마주쳤던 예쁜 이모를 떠올렸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잊히지 않았다.
만약 새엄마가 이모라면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다.
어차피 방금 주소도 확보했겠다 내일 아침 이모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내 가방을 챙겨 필요한 물건을 집어넣고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