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내가 속인 건 인정하지만 나를 이렇게까지 수배할 필요는 없잖아.’ 다음 순간, 박지한의 전화가 또 한 번 걸려 왔다. 나는 어렵게 북돋우는 용기가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수신 버튼을 누르려던 찰나, 옆을 지나가던 남자와 부딪혀 휴대폰이 날아갔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달려가 휴대폰 상태를 확인했지만 화면이 산산조각이 나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와 부딪친 남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영어로 사과하면서 나한테 다가왔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급하게 움직이느라 실수했네요. 휴대폰은 괜찮아요?” 휴대폰이 완전히 고장 난 것을 확인한 나는 절망에 빠져 그 남자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눈 똑바로 뜨고 다니세요. 이 큰 사람이 앞에 서 있는 게 안 보여요? 엇...” 나는 바로 욕설을 멈추고 눈앞의 남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도 나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선글라스를 벗고 나를 아래위로 한참 붍어보다가 말했다. “여기서 다 뵙네요.” ‘찻집을 운영하던 송 사장 아니야?’ 송기영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고,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선글라스를 벗고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손을 저으며 놀라서 물었다. “라온국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계세요?” 송기영은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면서 혼자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업을 하려면 여기저기 다녀야죠. 사모님은 왜 대표님이랑 함께 안 오셨어요.”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모님 말고 이제는 그냥 제 이름을 불러주세요.” 송기영은 멈칫하긴 했지만 바로 호칭을 바꿨다. “그래요. 시연 씨.” “그게...” 나는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제 이름은 온시연이 아니라 온나연이에요.” 송기영은 의아해하다가 손가락을 튕기면서 이상한 질문을 했다. “지금은 이혼하면 이름도 바꿔야 해요?” “일이 너무 복잡해서 지금 당장 설명하기는 어렵고요. 어디서 휴대폰을 수리할 수 있는지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켜지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