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고세연은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한 레이서였다.
레이싱복 차림의 그녀를 보고 반한 이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숫자를 늘어놓으면 지구를 세 바퀴 감고도 남았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서기훈은 재능 있는 레이서이자 고세연의 라이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둘은 얼굴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며 언제든 싸울 기세로 날카롭게 대립했다.
하지만 대중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달랐다. 그림자가 드리운 은밀한 공간마다 둘은 격렬하게 뒤엉켰다.
고세연은 서기훈 역시 자신처럼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른 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른 여자와 손을 잡고 경기장에 나타나는 걸 직접 목격하기 전까지는.
...
고세연은 업계에서도 손꼽히는 미모와 실력을 갖춘 레이서로, 데뷔 5년 만에 챔피언 타이틀을 싹쓸이했다.
아름다운 얼굴, 강렬한 카리스마, 걸크러시 매력까지 갖춘 그녀에게 향하는 구애는 레이싱 트랙을 열 바퀴 돌 만큼 길었다. 온갖 사람들이 그녀의 레이싱복 차림에 무너졌지만 정작 고세연은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천재 레이서 서기훈이 같은 팀에 합류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스치기만 해도 팽팽하게 맞섰다.
트랙에서 고세연이 서기훈의 타이어에 구멍을 내자, 서기훈은 그녀의 엔진을 통째로 분해해 버릴 만큼 기막힌 보복을 했고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리지 않으면 절대 물러서지 않는 태도를 보여 주변을 질리게 했다.
사람들은 뒤늦게야 두 사람이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양가에서 정해 둔 약혼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진실이 있었다. 낮에는 서로를 향해 치열하게 부딪히면서도 밤만 되면 상대를 뼛속까지 녹여 버리고 싶어 할 만큼 누구보다 서로에게 탐닉했다는 것이다.
방금도 두 사람은 휴게실에서 격렬하게 얽힌 직후였다. 다리가 풀린 고세연은 겨우 정신을 붙잡으며 레이싱복을 다시 갖춰 입었다. 숨겨진 피부 곳곳에는 키스 자국이 드러나 있었고 그녀는 심호흡하며 앞으로 있을 중요한 경기를 떠올렸다.
그때 소파 위에 놓인 휴대폰 화면이 반짝였다. 서기훈이 코치 호출에 급히 나가느라 휴대폰을 두고 간 모양이었다.
고세연은 무심히 휴대폰을 들고 그에게 가져다줄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화면에 떠오른 문자 내용이 그녀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기훈아, 내가 잘 알아봐 뒀어. 27번 차 여자 괜찮더라. 그래도 고세연 씨만은 못하지만. 걔 진짜 네 여자 친구야?”
순간 고세연의 머릿속에 ‘윙’하는 소리가 울리며 손끝까지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메시지를 열어 본 순간, 빽빽하게 쌓여 있던 채팅 기록이 눈앞에 드러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세연의 눈에는 선명한 핏발이 섰다.
“찰칵.”
휴게실 문이 열렸다. 손에 들린 자신의 휴대폰을 본 서기훈은 얼굴을 굳게 찌푸렸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휴대폰을 툭 낚아채 그대로 걸어 나가려 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고세연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설명 안 해? 송주아는 누구야? 그 여자가 네 여자 친구면 난 뭐야?”
서기훈은 마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 그냥 파트너 아니었어? 너도 나랑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잖아. 약혼도 취소할 거라고. 그리고 주아는 내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고세연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손끝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파트너?’
서기훈의 눈에 자신은 고작 그 정도의 존재였던 것이다.
눈가가 금세 뜨거워졌지만 고세연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다.
그 모습을 본 서기훈은 무의식적으로 휴지를 꺼냈다가 곧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이제 알았으니까 확실하게 말할게. 주아도 팀에 들어왔으니 우리 관계는 여기까지 하자. 어차피 사고로 시작된 사이잖아. 바로잡아야지.”
고세연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래, 끝내자. 네가 약혼만 취소할 수 있다면.”
잠시 망설이던 서기훈은 결국 뒤돌아서 휴게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만 공간에 울려 퍼졌다.
고세연은 다리에 힘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과 허탈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녀만 진심이었던 것이다.
서기훈과 첫 관계는 정말 ‘사고’였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약혼자라는 이유로 두 사람을 한 방에 밀어 넣었고 흐릿한 정신 속에서 결국 서로에게 몸을 맡겼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게 지나간 뒤였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찾았고 경주장 구석구석은 두 사람의 흔적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