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마음은 반쯤 부서졌지만 경기장에서 고세연의 컨디션은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맹렬하게 달렸다.
백미러에 27번 차, 송주아가 보였다.
몇 바퀴를 도는 동안 고세연은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
초보였고 기술도 부족했다.
평소 같았으면 첫 그룹에서 바로 탈락할 사람이었다. 그녀가 속한 팀은 아무나 받아주지 않았기에 낙하산이 아니라면 절대 합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세연은 경멸하듯 미소를 지으며 액셀을 밟았다.
앞은 커브 구간, 초보라면 절대 이곳에서 추월을 시도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뒤에서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고세연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창 너머로 송주아의 도발적인 눈빛이 스친 것이다.
그 순간, 고세연은 송주아의 의도를 단번에 깨달았다.
초보 따위가 그녀를 이기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고세연은 액셀을 끝까지 밟고 핸들을 거칠게 꺾었다. 차가 극단적인 각도로 회전했다.
그런데 송주아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따라 했다. 고세연이 할 수 있는 건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관람석에서 그 장면을 본 서기훈은 벌떡 일어나 온몸이 굳었다.
곧 “쾅!” 하는 굉음과 함께 27번 차가 뒤집혔다.
송주아는 기술 부족으로 회전을 버티지 못하고 차량이 그대로 전복된 것이다.
그 순간, 서기훈은 관람석 2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 뒤집힌 차량을 향해 미친 듯 달려갔다.
그 과정에서 지나치던 고세연과 스쳐 갔지만 그는 그녀를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역시나 고세연은 또다시 우승했다. 그러나 지금 그 우승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뒤집힌 27번 차 쪽으로 모든 구조대가 몰려들었다.
서기훈은 찌그러진 차 문을 두 손으로 잡아당기며 거의 날뛰고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고세연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걱정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미친 듯 고함치는 그의 목소리는 경기장 가장 바깥쪽에 서 있는 고세연에게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주아야, 잠들면 안 돼. 잠들면 안 돼... 아직 너한테 고백도 못 했단 말이야. 좋아해!”
고세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심장이 바늘로 찌르듯 조여오고 숨이 막혀왔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녀의 약혼자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겁게 젖어 들었다.
고세연이 서기훈을 처음 만난 건 한 연회에서였다. 술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창문으로 도망치던 그녀는 2층에서 그대로 서기훈의 품으로 떨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부터 고세연은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빠졌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자유분방하고 대담한 성격이었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서툴고 불안정하게 다가가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관심을 끌기 위해 이상한 신경전을 벌이는 방식을 택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앙숙이라고만 생각했지만 그 안에 얼마나 깊은 마음이 숨어 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구급차 사이렌이 울리자 고세연의 이성이 되살아났다.
구조된 송주아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 서기훈의 품에 안겨 있었다.
너무나 익숙한 장면이었다.
과거 경기 중 누군가의 방해로 고세연의 차에 불이 붙었을 때, 서기훈은 자신의 안전도 잊고 그녀를 불길 속에서 꺼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고세연은 상처 하나 없었지만 서기훈은 팔에 화상을 입었다.
그 흉터는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더는 보고 싶지 않아 고세연은 몸을 돌리며 눈가의 눈물을 훔쳤다.
비굴하게 매달리진 않을 것이다. 서기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녀 역시 붙잡지 않을 것이다.
가장 어린 레이서, 예쁘고 실력까지 있는 자신에게 남자가 없을 리도 없었다.
발을 떼려는 순간, 누군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서기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주아의 혈액형은 RH- 음성이야. 네 혈액형이랑 같아. 혹시 모르니까 너도 같이 병원에 가줘.”
고세연은 번개처럼 고개를 돌리며 서기훈을 노려봤다.
“왜 내가 그래야 하는데? 내 약혼자를 유혹한 불륜녀를 왜 구해야 해? 예전에 너, 나한테 피 한 방울도 흘리게 하지 않겠다고 했잖아.”
서기훈의 얼굴에 순간 당혹이 스쳐 지나갔다.
침대에서 건넸던 가벼운 속삭임을 그녀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는 걸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불편한 표정으로 거의 간청하듯 말했다.
“고세연,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마. 주아는 불륜녀가 아니야. 조건을 말해. 어떻게 해야 헌혈해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