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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하버시아 재계가 가장 침체됐던 그해, 최소아는 거액을 내고 강진혁의 아내 자리를 사들여 한 번쯤 대표 부인 놀이를 해봤다. 최소아는 10조 원을 쏟아부으며 스스로 악역을 자처했고, 강진혁과 그의 소꿉친구 유지아를 갈라놓았다. 강진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소아는 그의 재기를 끝까지 곁에서 도왔다. 그녀는 5년이 지나면 언젠가는 그의 마음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혼 5주년 기념일, 선물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이혼 서류가 들어 있었다. 최소아는 5년 동안 이어진 이 연극이 드디어 오늘 막을 내리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책상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보면서도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강 대표님, 그래도 저희가 5년은 부부였는데, 이쯤 됐으면 진짜 이유를 말해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강진혁이 정말로 이혼할 마음이었다면, 로펌에 맡겨둔 사인된 원본을 가져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 앞에 놓인 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서류였다. 그는 최소아가 먼저 서명하도록 몰아붙였고, 겉으로만 부부 행세를 하며 이 무정한 결혼을 계속 유지하자고 강요하고 있었다. 강씨 가문 안주인 노릇이 너무 힘들어서, 그 고생을 유지아에게 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맞은편에 단정히 앉아 차갑게 말했다. “우리 계약 끝났어. 이제 나가.” “저... 나갈 생각 없어요.” “왜?” “저 임신했어요.” 최소아는 담담하게 차 한 모금을 삼켰다. “제 아이는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되면 안 돼요.” 그녀는 강진혁이 자신을 증오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강도현이 10조 원 때문에 아들을 몰아붙여 결혼을 시켰고, 억지로 강진혁과 유지아라는 비극적인 한 쌍을 갈라놓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그녀와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최소아는 자신만 행복하다면 누가 괴로워지든 상관없었다. 강진혁은 그녀가 자기 인생을 망쳐놓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소아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하버시아에서 이렇게 떳떳하게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며 “강 대표님.”하고 정중히 그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그의 첫사랑이 정말로 그에게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정말 진심이었다면 그가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그를 버리고 해외로 떠나지는 않았을 테니까. “후회하지 마.” 강진혁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졌다. 최소아는 비웃듯 가볍게 웃었다. 그를 억지로 결혼식장으로 끌고 갔든, 아이를 핑계로 집으로 묶어두려 했든, 그녀는 단 한 번도 ‘후회’라는 말을 배워본 적이 없었다. “강진혁 씨, 제가 10조 원 써가면서까지 당신 옆에 있어줬는데, 배경 하나도 없는 학생이랑 연애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강진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는 꽤 귀여운 멜로디였고, 누가 일부러 골라서 설정해준 게 분명했다. 그 연락처에는 몽갈란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말이 적혀 있었다. 예전에 강진혁과 유지아가 몽갈란 초원에서 사랑을 확인했던 기억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정말로 지독하게 낭만적인 한 쌍이었다. 최소아가 먼저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요염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혁 오빠, 저번에 귀걸이가 조수석에 떨어졌더라. 언제 다시 차 몰고 나와? 내가 가서 찾아올게.” 최소아는 조용히 웃으며 휴대폰을 입가에 가져갔다. “여기는 제 남편 휴대폰이에요. 전화 잘못 거셨어요, 아가씨.” 그녀는 전화를 끊고 그대로 강진혁에게 던져주었다. “나는 당신하고 이혼 안 해요. 대신 그 여자한테는 손대지 말아요. 나 협박하기 전에 잘 생각해요. 지금 당신 손에 쥔 것들, 절반은 다 제 덕분이라는 거.” 최소아는 가방에서 소송장을 꺼내 손끝에서 흔들었다. “그 정도 급의 여자라면 원래 상대할 가치도 없었어요. 근데 당신이 너무 요란 떨었잖아요. 생일이라고 섬을 하나 사줬다면서요. 그 섬 값 절반도 내 돈이라는 건 잊지 말고요.” 소송장은 그녀의 손끝에서 떨어져 책상 위에 내려앉았다. 강진혁은 종이를 집어 들고 그 안의 청구 내용을 확인했다. 그동안 자신이 유지아에게 쏟아부은 모든 돈을 강제로 돌려달라는 소송이었다. 강진혁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최소아는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느릿하게 일어나, 그의 넥타이를 가지런히 매만져주었다. “지금쯤이면 유지아 씨도 소송장 받고 하버시아로 돌아오는 중이겠죠. 국제공항으로 데리러 갈 거면 옷 단정히 챙겨 입고 가요. 생각해봐요. 저 아니었으면 누가 그렇게 너그럽게 봐줬을 것 같아요? 누가 그렇게 당신 걱정해줬을 것 같아요?” 강진혁은 그녀를 깊게 한 번 바라보고는 손을 뿌리치고 나가버렸다. 최소아는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웃으며 바라봤다. 밤늦게, 최소아는 영양제를 먹고 막 잠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장미꽃 한 병을 들여왔다. 유지아가 보내온 꽃이라고 했다. 침대맡에 꽃을 놓자마자, 최소아는 냄새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곧바로 배가 심하게 뒤틀리듯 아팠고,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아랫배 아래로 피가 흘러 하얀 시트를 붉게 적셨다. 최소아는 급히 병원으로 실려 갔다. 그러나 아이는 끝내 살지 못했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의사는 이유를 선뜻 설명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최소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꽃과 자신이 먹던 영양제가 함께 작용해, 아무 소리도 없이 아이를 떨어뜨렸다는 걸. 의사가 나가고 난 뒤, 그녀는 입꼬리를 비틀며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붉게 충혈된 두 눈은 금방이라도 피를 머금고 흘릴 듯한 기세였다. 그녀는 강진혁이 이렇게까지 잔인하고 냉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가 유지아의 짓을 모를 리 없었다. 결국 자신과 피를 나눈 아이조차도 그의 ‘첫사랑’만은 못하다는 뜻이었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고민재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고 비서님... 그이는요?” “강 대표님은 유지아 씨 모시고 하버시아 센트럴 별장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께서 좀... 대범하게 넘기시라고...” 고민재는 과일 바구니를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최소아는 눈을 한번 감았다가 뜨고는,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장 서비스 예약해줘요. 두 사람 몫으로요. 강진혁한테 전해요. 유지아 씨를 제 아이 옆에 함께 묻히게 하든지, 아니면 강씨 그룹 지분 50%를 내놓고 저와 제 아이 장례를 치르게 하든지, 둘 중 하나 고르라고요.” 그렇지만 최소아는 그 두 가지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강진혁이 그동안 삼켰던 것들을 모두 토해내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유지아를 반드시 죽일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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