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녀의 힘 차이 때문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성유리는 결국 박진우가 끌고 가는 대로 거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주말이었기에 가정부의 정기 휴무일이었으므로 거실에는 그들 둘만이 있었다.
성유리를 소파에 내던진 뒤 맞은편에 앉은 박진우는 찻잔을 꺼내 차를 한 잔 따랐다.
“이혼 이유를 설명해.”
박진우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말해! 대체 이유가 뭐야?”
성유리가 냉소를 지었다.
“또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데요?”
차를 따른 박진우는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성유리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쿵!
찻주전자와 고급 대리석 탁자가 부딪치는 무거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유리, 너 이혼하면 얼마나 힘들지 생각해 봤어? 감옥까지 다녀온 여자가, 솔직히 말해서 일자리 찾는다고 해도 널 받아줄 데 없어.”
성유리는 차갑게 웃었다.
애초에 그녀는 남의 밑에서 일할 생각이 없었다. 앞으로 자신만의 사업을 만들 계획이었다.
“이렇게 말이 많은 걸 보니 할아버지가 쫓아낼까 봐 겁나는 모양이네요?”
성유리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요. 할아버지께 직접 전화해서 설명할 테니. 진우 씨와 양아현은 절대 언급하지 않을게요. 모든 건 내가 감당할 테니.”
말을 마친 성유리는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내가 가란 말 안 했잖아.”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마디 한 박진우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성유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박진우 씨, 사인은 빨리해 주시죠.”
한마디 하자마자 박진우가 성유리의 팔을 잡았다.
순간, 성유리는 온몸이 다시 공중에 뜨는 느낌이 들었다.
성유리를 다시 소파에 내던진 박진우는 긴 다리로 그녀의 허리를 가로질러 소파에 무릎을 꿇고 손목을 잡아 소파 등받이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성유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과거에도 두 사람은 뜨거운 시간을 보냈었지만 대부분 그녀가 먼저 시작했다.
지금 같은 상황은 정말 보기 드물었다.
성유리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박진우를 바라보았다.
“뭘 하려는 거예요?”
“며칠 동안만 정란 별장에 있어. 어디도 가지 말고. 할아버지께서 마음을 진정하기 전까지는 사인하지 않을 거야.”
박진우는 무거운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검은 눈동자는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함 같았다.
“진우 씨는 날 감금할 권한이 없어요.”
성유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거 놔요!”
하지만 박진우는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조카, 대낮에 전 부인을 괴롭히는 건 우리 박씨 가문의 체면을 깎아 먹는 일 아니야?”
극도로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별장 정문 쪽에서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들어오는 남자를 본 성유리는 순간 몸이 굳었다.
‘박지훈? 이 사람이 왜 여기에?’
박지훈이 들어온 것을 본 박진우는 얼른 성유리를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아버지?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재빨리 몸을 일으킨 성유리는 무의식적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어제 네 할아버지가 크게 화를 냈다는 얘길 들었어. 오늘 시간이 나서 한번 들렀다 가려고. 강훈이 어제 본가에서 잤는데 내가 온 걸 보고는 울며 나더러 데려다 달라고 하더라고.”
담담하게 한마디 한 박지훈은 성유리를 한 번 스쳐보았다.
1초 정도 시선을 마주친 후 그는 고개를 돌렸다.
마이바흐를 타고 정원으로 들어올 때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를 듣고 비서 정영준에게 아이를 데리고 뒷마당으로 가도록 지시했다.
“강훈이는요?”
“너희들이 이렇게 싸우는데 아이를 어떻게 데리고 들어오겠니?”
박지훈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성유리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선을 맞은편 남자에게 고정한 성유리는 강력한 기운에 주변의 모든 것이 압도되는 것 같았다.
박진우가 박지훈에게 차 한 잔 따랐다.
“작은 아버지, 우리 이혼 문제로 얘기 중이었어요. 어제 할아버지께서 크게 화내신 걸 아시잖아요. 일단 할아버지 마음부터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에요.”
찻잔을 흘끗 본 박지훈은 마시려는 기색 없이 싸늘한 말투로 한마디 했다.
“이미 이혼하기로 했으면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마.”
박진우는 잠시 멈칫했지만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삼켰다.
솔직히 말해 그가 가진 자산 대부분은 박씨 가문, 특히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오늘의 성적을 이룬 데에는 할아버지의 도움이 컸기에 어르신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가 할아버지께 전화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내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원하는 거라고 말씀드릴게요. 그러니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마세요.”
성유리는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박지훈의 등장은 탈출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오늘 밤 정말로 정란 별장에서 지내야 할 판이었다.
성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진우는 찻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박지훈의 차가운 시선과 마주치고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작은 아버지, 이왕 온 김에 저녁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다음에. 일이 있어.”
박지훈이 일어나 성유리의 뒤를 따라 나갔다.
“엄마, 왜 왔어요?”
문 앞에 다다른 성유리는 박강훈과 마주쳤다.
‘왔다’는 말에 성유리의 입가에 비웃음이 피어올랐다.
아들은 이렇게 상황 파악을 잘하는데 아비는 모르는 척이니 말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아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 이제 갈 거야.”
그러고는 아이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엄마를 바라보는 박강훈은 가슴이 유난히 무거워졌다.
성유리를 붙잡고 싶었지만 엄마가 정말로 집에 남을 생각을 하니 또 꼴 보기 싫어졌다.
게다가 내일 아현 이모가 학교에 데려다주기로 했는데 엄마가 있으면 아현 이모가 못 올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박강훈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성유리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정원을 나온 성유리는 택시를 잡아탔다.
마이바흐에 타고 있는 박지훈은 앞 유리를 통해 성유리가 택시에 타는 모습을 지켜봤다.
운전석에 있는 정영준은 백미러로 박지훈의 어두운 얼굴을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 대표님, 성유리 씨에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신가요? 제가 속도를 내서 따라잡을까요?”
“아니.”
시선을 돌려 손에 든 태블릿을 바라보던 박지훈은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운전석의 정영준을 바라보았다.
“그 하성이라는 옥 조각사, 아직도 소식 없어?”
“네.”
정영준이 조용히 대답했다.
“오늘도 연락이 없습니다.”
박지훈이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게 3년 전 언제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