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이제부턴 사람답게 잘 살아요. 앞만 보고.”
교도관의 마지막 당부와 함께 성유리는 3년 동안 갇혀있던 감옥 문을 나섰다. 이렇게 따뜻한 햇살을 온몸으로 맞이하는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마이바흐에서 낯익은 두 사람이 내리더니 그녀에게 다가왔다.
“유리야, 데리러 왔어.”
성유리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눈앞의 두 사람이 바로 그녀의 남편 박진우와 아들 박강훈이었다.
그녀와 눈을 마주한 순간 박진우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3년 사이에 왜 이렇게 많이 변했지?’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한때는 밝고 활기 넘치던 여자가 앙상하게 마른 채 불안에 떨고 있었다.
‘분명히 교도소에 손을 써뒀는데... 혹시 연기하는 건가?’
박진우의 머릿속에 3년 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더니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연기든 아니든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야.’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기 그지없었고 또 죄책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타. 감방에 3년 동안 있었으니까 깨달은 게 있겠지. 다시는 같은 잘못 반복하지 마.”
옆에 있던 박강훈의 얼굴에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 예전에 정말 예뻤었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고 웃을 때도 한없이 다정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박강훈이 싸늘하게 말했다.
“아빠 말이 맞아요. 아현 이모가 착해서 엄마를 용서해준 거예요. 근데 엄마, 또다시 아현 이모를 괴롭히면 아빠랑 난 엄마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용서?”
성유리는 순간 멍해졌다. 두 눈에 고통과 조롱이 스치더니 코웃음을 쳤다.
“자기 아내, 자기 엄마를 감옥에 넣은 사람들이 무슨 자격으로 용서를 입에 담아요?”
눈앞의 부자는 한때 성유리가 목숨보다 더 사랑했던 남편과 아들이자 3년 전 그녀를 감옥에 보낸 장본인들이었다.
박진우가 그녀의 생명의 은인이라는 이유로 그와 결혼을 결심했다.
당시 박씨 가문이 성씨 가문보다 형편이 좋지 않았다. 성유리는 혼수와 자원을 싸 들고 시집왔다. 심지어 어머니와 싸우면서까지 박진우와 결혼했다.
결혼 후 그녀는 가정을 위해 하던 일도 포기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의사였지만 집안일을 도맡아 하며 하루하루 늙어갔다.
성유리는 이렇게 하면 언젠가 존중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녀를 대하는 박진우의 태도는 항상 냉랭했다.
이젠 아들 박강훈도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심지어 이런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엄마는 하는 일도 없잖아요.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자격 없어요.”
처음에는 두 부자의 성격이 원래 무뚝뚝한 줄로만 알았다. 그러다 박진우의 첫사랑인 양아현이 귀국하고 나서야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양아현 앞에서 박진우는 이전의 냉정하고 고고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눈웃음까지 지으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박진우도 이렇게 다정하게 웃을 줄 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결혼기념일 날 성유리가 출산 후유증이 재발하여 복통으로 힘들어할 때 박진우는 양아현의 생일 파티에 가기 위해 그녀의 구조 요청 전화를 끊어버렸다...
나중에 수술까지 하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동안에도 두 부자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퇴원 후 집에 돌아가 보니 성유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엉망진창인 집과 원망스러운 표정의 아들, 그리고 무관심한 남편이었다.
아들은 심지어 그녀에게 원망까지 쏟아냈다.
“엄마는 제대로 된 엄마가 아니에요.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안 들어오면 청소는 누가 해요? 아현 이모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어요.”
‘허. 청소? 난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은 철이 없어 그런 것이고 박진우는 원래 차갑고 무뚝뚝한 사람이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아이도 있는데 이혼이야 하겠는가?
그러다 어느 날 파티에서 양아현이 높은 곳에서 추락했는데 성유리가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녀의 남편과 아들은 CCTV조차 확인하지 않고 양아현을 위해 증언했다.
그때 성유리는 배를 움켜쥐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박진우에게 자신을 믿어달라고 애원했었다. 바닥의 모래와 돌 때문에 손에서 피가 다 났다.
하지만 박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하기만 했다. 그녀가 고급 맞춤 양복을 더럽힌 게 짜증이 나 손수건으로 옷자락만 닦았다.
박강훈이 싸늘하게 비웃으면서 성유리를 힘껏 밀쳤다.
“악독한 여자는 우리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요. 날 낳을 때 차라리 수술대에서 죽지 그랬어요? 그럼 아현 이모가 우리 엄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절망에 빠진 성유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멍청하다는 생각에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그녀는 고의 상해죄로 감옥에 들어가 3년을 보냈다.
감옥에 흉악한 범죄자들이 가득했고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3년 동안 성유리는 감옥에서 온갖 학대를 받았다.
하지만 남편과 아들은 그녀에게 무관심했고 면회 한번 오지 않았다. 만약 감옥에서 죽을 뻔했던 일이 없었더라면...
박진우가 싸늘하게 말했다.
“나랑 강훈이가 네가 감옥에 다녀온 걸 뭐라 하지 않고 집에 데려가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아현이 지금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간 낭비하지 말고 얼른 가자.”
박강훈의 인내심도 슬슬 바닥났다.
“그래요, 엄마. 징징거리지 말아요. 아현 이모가 저녁에 곰돌이 쿠키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단 말이에요. 늦게 가면 아현 이모 주려고 산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다 녹아요.”
두 사람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성유리는 마음속에 비웃음이 점점 가득 찼다.
‘곰돌이 쿠키?’
박강훈은 잊었을지 모르지만 만들기 번거로운 그 간식은 원래 성유리가 아들 박강훈을 위해 직접 연구하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나중에 양아현이 몰래 훔쳐 배웠다.
똑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는데도 아들은 그녀가 만든 것보다 양아현이 만든 게 더 맛있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과 아들은 출소한 성유리를 데리러 왔으면서도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첫사랑 양아현뿐이었다.
양아현과 성유리 사이에서 두 부자는 언제나 양아현을 더 믿었고 편애했다. 심지어 그녀가 열 달 동안 품고 낳은 아들마저도 양아현을 훨씬 더 따랐다.
성유리가 고개를 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박진우의 차가운 눈빛에 짜증과 혐오가 스쳐 지나갔다.
“안 돌아간다고? 전과자인 네가 박씨 가문을 떠나서 뭘 할 수 있는데? 성유리, 3년이나 지났는데도 어쩜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그건 내 일이에요. 두 사람이 전과자인 아내와 엄마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날 지옥으로 밀어 넣은 남편과 아들을 원하지 않아요.”
사람이 아무리 가르쳐도 안 되는 건 직접 겪어보면 충분히 깨달을 것이다.
3년 전 성유리는 박진우 부자를 깊이 사랑했다. 그들이 그녀를 냉대하고 싫어하면서 양아현을 가까이해도 마음을 되돌리기를 기대했었다.
하지만 3년간의 고통으로 그녀의 마음은 진작 죽어버렸다.
남편과 아들, 이젠 필요가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성유리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