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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그제야 뒤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토록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명의상 언니인 윤아린 하나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동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세아야, 이런 상황에서 처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이강현! 내 동생한테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하라고 했지, 도가 지나쳤다는 생각은 안 들어? 자칫 봉변당할 뻔했잖아.” 윤아린이 투덜거리고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미안, 방금은 장난이었어. 네가 3년 동안 강현한테 매달려서 질투가 좀 났거든. 그래서 다른 사람한테 보내라고 농담 삼아 얘기했는데 생각과 달리 일이 커졌네. 괜찮아? 많이 놀랐어?” 하지만 눈빛은 조롱으로 가득했고 말투는 의기양양했다. “아린 씨도 마음이 너무 약해서 탈이네요. 사생아 주제에 아린 씨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강현 씨한테 얼마나 집적거렸는지 알아요? 나였으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봉변당하는 꼴을 똑똑히 지켜봐야 속이 좀 후련할 텐데.” 누군가 문득 입을 열었고 윤아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를 타박했다. “아린 씨랑 강현 씨가 소꿉친구인 건 공공연한 사실이잖아요.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결국 3년 동안 헛수고만 했네요. 이제 제 자리로 돌려놓을 때가 왔죠.” 나는 고개를 숙이고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루만지며 조소를 머금었다. 주제라니? 헛수고? 제 자리로 돌려놓는다고? 웃기지 마! 이강현이 나를 버리는 일은 없다. 만약 진짜 심심풀이 장난감에 불과하다면 김정훈에게 수모를 당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게임에서 진 대가로 다른 남자한테 넘겼다가 다시 부지와 맞바꿨다는 건 그만큼 소중한 존재란 뜻이지 않은가? 나를 보내주기 아쉬웠다는 자체만으로도 만족했다. 어쨌거나 3년 동안 노력한 보람은 있으니까. 김정훈이 옷을 찢어버리는 바람에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한쪽 어깨가 훤히 드러났다. 윤아린이 말을 마치자 나는 이강현을 바라보았고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강현아,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어 줘.” 그녀는 다가가서 이강현의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알았어.” 이강현이 대답했다. 그리고 떠나기 직전 외투를 집어 들어 내 몸을 덮어주었다. 곧이어 훤히 드러난 속살이 옷에 가려졌다. 윤아린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불쾌한 말투로 말했다. “너 결벽증 있는 거 아니야?” “남이 만진 거라 버리려고.” 만족스러운 답변에 그녀는 비로소 한시름 놓았다. “결국 버림받았네? 이참에 나랑 만날래?” 이강현과 윤아린이 떠나자마자 김정훈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나는 이강현의 발걸음이 멈칫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내 허둥지둥 테이블에서 내려와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날 버린 게 아니거든요? 그쪽이랑 만날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클럽을 나섰다. 겨울밤,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영하로 떨어진 날씨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보라를 뚫고 이강현과 윤아린이 차에 오르기 직전 앞을 가로막고 애원했다. “언니랑 경쟁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아요. 물론 형부가 사랑하는 사람도 언니뿐이죠. 하지만 형부를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에요. 그냥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윤아린의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대뜸 손을 들어 뺨을 내리쳤다. “어떻게 그런 뻔뻔스러운 소리를 할 수 있어?” 따귀를 연속 얻어맞은 탓에 어느덧 얼굴이 부어올랐지만 시종일관 비굴한 모습으로 말했다. “언니, 화 풀어요. 아무것도 안 하겠다고 약속할게요. 언니랑 형부를 방해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윤아린이 펄쩍 뛰면서 다시 한번 손찌검하려고 했지만 이강현에게 제지당했다. “그만 때려. 네 손만 아프잖아.” “아직도 뻔뻔스럽게 너한테 매달리겠다고 하잖아.” 윤아린의 푸념에 이강현은 그제야 나를 돌아보며 피식 비웃었다. “따라오라고 해.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지 보여주자고.” 나는 소원대로 이강현과 윤아린을 따라 별장으로 돌아갔다. 엄동설한에 안에 들어가는 대신 밖에서 벌을 섰다. 밤이 되자 그는 윤아린과 함께 2층 침실로 올라갔고, 창문 너머로 뒤엉킨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밖에서 소리까지 들리지 않았지만 윤아린이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고 교성을 내뱉었다. 한밤중 추위를 견디지 못해 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이강현이 밖으로 나와 내 앞에 나타났다. “아파?” 키가 훤칠한 그는 손을 뻗어 내 턱을 치켜들더니 발갛게 부은 볼을 어루만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아니요. 다만 절 더럽다고 생각해서 진짜 형부한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요.” “김정훈이 어딜 건드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강현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웠다. 나는 서둘러 해명했다. “아무 데도 안 건드렸어요. 단지 형부가 선물한 옷을 망가뜨렸을 뿐...” 이강현이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미워?” “그럴 리가! 형부 곁에 있게만 해줘요.” 곧이어 난폭한 키스가 이어졌고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등이 차체에 닿았다. 이강현은 문을 열고 나를 의자에 눕혔다. 그가 양팔을 누르고 목에 입을 맞추는 순간, 내 눈길은 2층 베란다를 향했다. 어느새 나타난 윤아린이 우두커니 서서 유령처럼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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