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결혼 5주년 기념일, 온서연의 세 살배기 딸 시아가 갑자기 미열이 났다. 그녀는 즉시 가정 의사를 불렀다.
아이를 꼼꼼히 진찰한 후, 의사는 혈액 검사 결과를 손에 쥐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한 의사는 망설임 끝에 입을 열었다.
“온서연 씨, 시아가... 확실히 온서연 씨 친딸이라는 거죠?”
온서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의사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정의사 이현성은 그녀에게 검사 결과를 내밀며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과 박 대표님 둘 다 B형 혈액형인데 아이는 혈액형이 A형이에요.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예요.”
온서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는 황급히 시아를 데리고 친자 확인을 하러 갔다.
[혈연 관계없음.]
보고서의 글자가 눈에 들어온 순간, 그녀는 세상이 빙빙 도는 듯했고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문득, 시아를 낳던 날 자신이 난산으로 심각한 출혈을 겪고 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눈을 떴을 때, 박태준이 갓난아이를 안고 부드러운 미소로 그녀의 곁을 지키며 예쁜 딸을 낳았다고 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모든 정성을 쏟았던 아이가 사실은 내 아이가 아니었다니! 그렇다면 10달 동안 임신하고 반쯤 죽어가며 낳은 아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태준 씨는? 태준 씨는 당시 병원에 있었는데 알고 있었던 걸까?’
온서연은 온리 그룹의 외동딸이자 부모님의 소중한 보물 같은 존재였다. 박태준이 그녀를 쫓아다닐 때 얼마나 미쳤는지 온 서울이 알 정도였다. 별이라도 따다 바치고 싶어 했었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친자식이 모르는 아이와 바뀌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온서연은 즉시 박태준을 찾아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 운전 기사에게 시아를 집으로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후 박태준이 오늘 가기로 했던 비즈니스 클럽으로 차를 몰았다.
가던 도중, 앞쪽에서 격렬한 소란이 일더니 길이 막혔다. 두 패거리가 싸우고 있었고, 현장은 혼란 그 자체였다.
구경할 마음이 없어 차를 돌리려던 찰나, 온서연의 시선이 가장 거칠게 공격하고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싸우는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그의 비싼 양복 외투는 엉망으로 찢어져 있었고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었으며 입가에는 멍 자국이 있었다.
필사적으로 상대방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는 그의 잔혹한 기세는 온서연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언제나 품위 있고 체면을 중시하는 그녀의 남편, 박태준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에게 그런 모습도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박태준은 뒤늦게 달려온 몇몇 친구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왔다.
온서연은 차에서 내려 그들의 뒤를 따랐다.
“태준아, 누군가 클럽 복도에서 윤해린에게 손을 댄 것 가지고 사람을 죽일 듯이 때리는 거야?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맞아. 지난번 자선 만찬 때 안해린이 약 먹고 룸으로 끌려갈 뻔했을 때도 그랬어. 최씨 가문의 사생아라는 걸 알아냈지만 결국 상대방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게 한 거로 끝냈잖아? 그때는 이 정도로 이성을 잃지 않았어.”
“게다가 이런 꼴로 집에 들어가면 시아가 놀라잖아. 형수님이 묻기라도 하면...”
“안 그럴 거야.”
박태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을 끊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변호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시아는 나와 해린이의 친딸이야. 아빠가 엄마를 보호하다 다쳤다는 걸 알면 분명 기뻐할 거야.”
주변에서 누군가 거들었다.
“시아가 점점 커가면서 안해린을 닮아가고 있어.”
온서연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벼락을 맞은 듯, 온몸의 피가 그 순간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는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태준의 다음 말이 그녀를 절벽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온서연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숨을 거뒀어. 안해린이 서연이가 충격을 받을까 봐, 우리 아이를 대신 키우라고 했어. 해린에게... 나는 결국 미안한 마음뿐이야.”
그는 잠시 멈췄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모녀에게 최대한 보답하는 것뿐이야.”
‘그렇구나!’
온서연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보물처럼 여기던 딸이 사실은 남편과 다른 여자의 아이였다니!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직접 계획했던 것이었다! 그녀 자신의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죽었다고 했다!
7년 전, 온서연은 심각한 병을 앓았고 수술을 위해 수혈이 급히 필요했지만 혈액 재고가 부족했다. 당시 그녀의 부하 직원이던 안해린이 나서서 그녀에게 헌혈을 해주었다.
안해린의 목숨을 살린 은혜에 감사하며, 온서연은 그녀에게 거액의 돈을 주었고 심지어 친구처럼 여기며 다정하게 지냈다.
박태준 역시 그녀에게 감사하며 업무상 자주 챙겨주고 신경 써주었다. 온서연은 그 ‘감사’가 침실에서의 관계로 이어지고, 심지어 아이를 바꾸는 데까지 이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안해린을 믿고 속마음을 털어놓았으며 박태준을 완벽한 남편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박태준의 친구들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형수님이 혹시라도 언젠가 알게 되면...”
박태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늘 그랬듯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나는 서연이를 변함없이 사랑할 것이고 서연이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도록 할 거야. 너희들 모두 입 조심하고 더는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마.”
말을 마친 그는 휴대폰을 꺼내 능숙하게 온서연의 번호를 찾았다. 그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다정하고 애틋하게 변했다.
“서연아, 갑자기 급한 프로젝트 때문에 출장을 가야 해서 며칠 후에나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아. 보고 싶어. 기다려.”
멀지 않은 곳에서, 온서연은 이 익숙한 사랑의 말을 들으며 온몸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꽉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 그의 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달콤함을 느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서 애인을 위해 싸우고 옷차림이 흐트러진 박태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휴대폰 화면에서 반짝이는 프로필 사진을 내려다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촘촘한 아픔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박태준은 업계에서 유명한 바람둥이였다. 여자를 옷 갈아입듯 바꾸었고 고정된 관계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사업 만찬에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 미친 듯이 구애를 시작했다.
그녀를 위해 그는 모든 날카로움을 거두고 금연과 금주를 하며 시간마다 보고했다. 불필요한 약속을 거절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미술 전시회와 서점에 데려가고, 그녀가 무심코 말했던 디저트를 전달하기 위해 새벽까지 그녀 집 아래에서 기다리곤 했다. 그렇게 정중하게 대우받던 온서연은 그의 다정함에 깊이 빠져들어 결국 자신을 내어주었다.
결혼 5년 후, 그들은 여전히 모두가 부러워하는 잉꼬부부였다. 모두가 그녀의 능력이 뛰어나서 바람둥이를 개과천선 시켰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바람둥이는 절대 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위해 잠시 정박했을 뿐, 마음속에는 늘 다른 바다가 담겨 있었다.
온서연의 심장은 칼에 찔린 듯 아팠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손톱이 손바닥에 깊숙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다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대화창을 열었다.
[오늘 우리 결혼 5주년 기념일인데 오늘만 지나고 가면 안 될까요?]
그녀는 마지막 남은 희미한 시도를 보냈다. 만약 박태준이 남아서 상처의 유래를 설명하고, 그녀에게 숨겼던 모든 것을 고백했다면 그녀는 조용히 물러나 박씨 가문의 체면을 지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박태준이 답장을 보내 왔다.
[자기, 이 프로젝트는 회사에 매우 중요해. 내가 돌아오면 꼭 잘 보상해 줄게.]
온서연은 휴대폰 화면의 차가운 글자를 보다가 박태준의 등 뒤를 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입술을 살짝 깨물며 눈 속의 마지막 빛이 순식간에 꺼졌다.
알고 보니 그의 다정함과 보상은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사랑과 마음은 두 개로 나눌 수 있었다.
‘태준 씨, 태준 씨의 마음은 어떻게 두 여자를 담을 수 있어요?’
온서연은 황급히 몸을 돌려 거의 도망치듯 자신의 차에 올라타 운전석에 몸을 웅크린 채 눈물을 쏟아냈다.
거의 실신할 정도로 울고 나서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차가운 결연함이 번뜩였다.
모든 심혈을 기울여 키운 ‘딸’을 그녀는 더는 원치 않았다. 박태준 이 거짓말쟁이도 더는 원치 않았다.
안해린이 그의 마음속 여신이고, 시아가 그들 사랑의 결정체라면 그녀는 그들을 이루어주리라 결심했다. 온서연은 심호흡하고 눈물을 닦은 뒤 시동을 걸었다.
시내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비서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파도 한 점 없이 평온했다.
“본부에 통보해. 해외 지사를 내가 가서 맡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