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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결혼 3년 차, 남편이 샤워하는 사이 허민아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 속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찬율 오빠, 오빠를 떠난 뒤로 난 정말 힘들게 지냈어. 매일같이 오빠가 너무 보고 싶어.] [내일이면 나 결혼해. 마지막 소원은 결혼 전에 오빠를 한 번만 보는 거야. 내 첫날밤을 오빠에게 주고 싶어. 30분 기다릴게. 오빠가 오지 않으면 자살할 거야.] 이 두 메시지를 보는 순간, 허민아는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멍하니 굳어버린 채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 배찬율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휴대폰을 한눈에 훑어보더니 곧장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다. 급히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허민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결국 그를 불러 세웠다. “찬율아, 남자들은 가정으로 돌아온 뒤에도 본처와 애인 사이에서 가장 미안한 사람은 항상 애인이라고 느낀다던데... 맞아?”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배찬율은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린 채 짜증과 피로가 섞인 어투로 말했다. “허민아, 난 이미 가정으로 돌아왔어.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야 하지?” 그의 차가운 말투는 망치처럼 허민아의 가슴을 내려쳤고, 그 순간 그녀의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녀는 묻고 싶었다. 몸은 돌아왔을지 몰라도 마음은 여전히 김예은에게 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입을 열 기회조차 주지 않고 문을 세게 닫고 나가버렸다. 허민아가 눈을 감자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와 배찬율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고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라 불리던 사이였다. 그는 그녀가 무심코 교외에 있는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말하면 자전거를 타고 반 도시를 가로질러 사 왔고, 시험을 망쳐 우울해하면 밤새 옆에서 함께 공부해 주었으며, 생리통으로 배가 아프면 땀을 뻘뻘 흘리며 서툰 손으로 따뜻한 물을 끓여주곤 했다.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허민아는 배찬율의 손바닥 위에서 자란 공주라고. 그래서 양가 부모의 축복 속에 약혼했을 때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김예은이라는 후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허민아가 김예은을 처음 본 건 배찬율의 졸업식 날이었다. 머리를 하나로 묶은 그 여자아이는 배찬율의 옆에 서서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예은이 자연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지만 배찬율은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허민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후로 그녀는 배찬율의 입에서 ‘예은’이라는 이름을 자주 듣게 되었다. “예은이 오늘 도서관에서 절판된 책을 찾아줬어...” “예은이도 <인터스텔라>를 좋아한대. 우리 밤새 얘기했어...” “예은이가 일출 보러 가고 싶다길래 주말에 같이 가기로 했어...” 김예은을 이야기할 때 반짝이던 배찬율의 눈을 보며 허민아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꽉 움켜쥐어진 듯 아팠다. 그 눈빛은 너무도 익숙했다. 예전에 자신을 바라보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의 휴대폰에서 가장 중요한 표기가 된 사람이 김예은인 것과, 모든 일상을 그녀에게 공유하고 있는 것을 보고 완전히 무너졌다. 자신만을 사랑하겠다던 배찬율이 정신적으로 외도하고 있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선을 넘지 않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는 김예은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민아는 고통 속에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놓지 못했다. 그래서 선택을 강요했다. 약혼을 파기하든지 아니면 김예은과 완전히 끝내든지. 수차례의 갈등 끝에 배찬율은 김예은과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선택했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됐지만 허민아는 결혼 후의 그가 마치 혼이 빠져버린 사람 같다는 걸 분명히 느꼈다. 데이트하다 갑자기 어디론가 시선을 멍하니 두고 오래 말이 없거나, 자주 서재에 틀어박혀 술에 취해 의식을 잃기도 했다. 기념일이나 밸런타인데이에도 예전처럼 정성을 들이지 않고 꽃 한 다발, 선물 하나로 대충 넘겼다. 허민아는 자신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다. 시간과 감정을 충분히 주면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배찬율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그녀가 몇 년간 필사적으로 데우려 했던 건 그저 껍데기뿐인 몸이었다. 그의 영혼도, 사랑도, 열정도 이미 김예은에게 남아 있었고 더는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다. 이 결혼은 이미 이름뿐이었고 그녀 역시 더 버틸 이유가 없었다. 허민아는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날이 밝자마자 이혼 절차를 알아보려 휴대폰을 집어 들었는데, 그 순간 배찬율의 결혼식 난입 영상을 보게 되었다. 영상 속에서 배찬율은 말끔한 정장을 입고 결혼식장으로 뛰어들어 사람들 앞에서 김예은의 손을 잡았다. 화면은 흐릿했지만 그의 얼굴에 떠오른 오랜만의 의기양양함이 분명히 보였다. 그 모습은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백하던 그 시절과 똑같았다. 허민아의 손가락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고 10초짜리 그 영상을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다. 여덟 번째로 새로 고침 했을 때 영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 하지만 그 장면들은 이미 뜨거운 인두처럼 그녀의 망막에 깊이 새겨졌다. 달리며 휘날리던 그의 옷자락, 놀란 듯 기뻐하던 김예은의 표정, 그리고 두 사람이 손을 맞잡았을 때 그의 손등에 있던 너무도 익숙한 작은 점까지...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듯 찬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허민아는 눈물을 닦고 망설임 없이 모든 서류를 챙겨 이혼 신청을 하러 갔다. 하지만 법원 직원은 그녀에게 청천벽력 같은 말을 전했다. “허민아 씨, 배찬율 씨와의 혼인신고서는 위조된 것입니다. 법적 효력이 없습니다.” 허민아의 머릿속은 새하얘졌다. 3년 전 3월 14일, 혼인신고를 하러 갔을 때 줄이 너무 길다며 배찬율이 혼자 처리하겠다고 했던 일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 순간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를 믿었다. 그가 그 고비를 넘을 수 있다고, 김예은을 완전히 잊고 자신을 선택할 거라고 말이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그녀의 머릿속엔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았다. ‘가짜 이혼이라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 또한 해방이 아닐까.’ 창백한 얼굴로 법원을 나서려던 순간,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이 희미해진 가운데 눈을 뜨자 간호사가 차트를 들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남편분께 전화하세요. 지금 당장 오셔야 합니다.” 허민아는 자신이 큰 병에 걸린 줄 알고 순간 머리가 하얘진 채 배찬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섯 번, 일곱 번... 하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인내심이 거의 바닥났을 때 마침내 연결되었지만 들려온 것은 그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만 전화해. 회의 중이야.” 통화는 3초 만에 끊겼지만 그녀는 분명히 들었다. 김예은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허민아는 손바닥에서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후 간호사의 재촉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남편이 없어요. 제 몸 상태만 알려주세요.” 간호사는 놀란 얼굴로 검사지를 내밀었다. “남편이 없다니요? 그럴 리가요? 임신 3개월이신데요. 태아의 장기와 신체가 이미 형성됐어요. 초기 관리가 부족해 영양 상태가 좋지 않으니 아이 아빠를 빨리...” 임신이라는 말에 허민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며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는 평평한 배를 내려다보며 한동안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나 곧 냉정해진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필요 없어요. 수술 준비해주세요. 이 아이는 낳지 않겠습니다.” 한 시간 후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허민아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 그녀가 생리통으로 힘들어할 때 배찬율은 밤새 곁을 지키며 배를 문질러주고 따뜻한 물을 가져다주었다. 그녀가 예쁜 옷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수많은 디자이너를 고용해 그녀만을 위한 옷을 만들었다. 세기의 결혼식을 원한다고 하자 열여덟 살부터 그녀 취향과 금기를 수천 가지 정리했다. 그렇게 그녀를 수없이 설레게 했던 사람은 오늘 이후 완전히 과거가 될 것이다. 수술이 끝난 후 허민아는 허약한 몸으로 간호사를 찾아 태아의 배아를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떠나는 날 그것을 배찬율에게 이별의 선물로 남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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