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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병원에서 며칠 더 요양한 뒤 허민아는 혼자 퇴원했다. 의사는 우울 증세가 있다며 자주 밖에 나가 기분 전환을 하라고 권했다. 날씨도 따뜻해졌기에 그녀는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도심 남쪽까지 걸어온 그녀는 조금 지쳐 한 조용한 바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창밖에서 익숙한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 배찬율과 김예은이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김예은의 얼굴에 크림이 묻자 배찬율은 손수건을 꺼내 다정하게 닦아주었고, 풀린 신발 끈을 보자 쪼그려 앉아 직접 묶어주었다. 허민아는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예전 연애하던 시절 그가 자신에게도 그랬던 기억을 떠올렸다. 세월이 흘렀고 마음도 변했다. 이제는 자기 자신을 놓아줄 때였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커튼을 닫으려 했지만 김예은이 배찬율을 끌고 같은 바 안으로 들왔다. 하필 그녀 옆방을 선택했는데 방음이 좋지 않아 그들의 대화가 또렷이 들려왔다. “오빠, 결혼식에서 도망간 뒤로 부모님이 너무 화가 나셨어. 계속 맞선을 보지 않으면 연을 끊겠대. 어떡하지? 난 다른 남자랑 함께하고 싶지 않아. 명분이 없어도 괜찮아. 그냥 오빠 곁에 있고 싶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배찬율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들렸다. “부모님께 말해. 내가 너랑 혼인신고 할 거라고.” 그 말을 듣자 김예은은 잠시 굳어버리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어투로 물었다. “혼인신고? 하지만 오빠는 이미 허민아 씨랑 결혼한 거 아니야?” “우리는 결혼식만 올렸지 혼인신고는 한 적 없어. 며칠 뒤 결혼기념일을 핑계로 허민아를 해외여행 보내서 자리를 비우게 하고 너랑 혼인신고 하러 갈 거야.” 허민아의 손끝이 손바닥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됐다. 그가 정성껏 준비했다던 결혼기념일 깜짝 이벤트는 그녀를 잠시 떼어놓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순간 허민아의 심장은 날카로운 칼날에 찔린 듯 아파져 피투성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녀는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려 창백한 얼굴에 보기 힘든 미소를 지었다. 옆자리에서는 혼인신고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했지만 허민아는 더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도망치듯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거울 속 여자는 얼굴이 새하얗고 눈가가 붉게 충혈돼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떨리는 손가락을 씻어냈지만 가슴속에서 요동치는 고통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화재 경보가 술집 전체에 울려 퍼졌다. “불이야! 빨리 도망쳐!” 아수라장이 된 비명 속에서 허민아가 문을 밀고 나가자 짙은 연기가 순식간에 얼굴을 덮쳤다. 그녀는 입과 코를 막고 사람들에 섞여 비상구 쪽으로 밀려갔다. 그때, 사람들의 흐름을 거슬러 뛰쳐나오는 배찬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셔츠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얼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예원아! 예원아, 어디 있어?” 누군가 그를 붙잡고 외쳤다. “들어가지 말아요! 안에 전부 불이에요!” 하지만 배찬율은 미친 사람처럼 그 손을 뿌리치고 망설임 없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뒷모습은 단호하고도 결연했다. 앞이 설령 칼산 불바다일지라도 김예은을 데리고 나오겠다는 듯했다. 허민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문득 열여섯 살 때 겪었던 산사태가 떠올랐다. 그때 그녀는 잔해 아래에 깔려 죽어가고 있었다. 배찬율은 맨손으로 밤새도록 파헤치며 열 손가락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녀를 죽음의 손아귀에서 끌어냈다. 그 순간부터 허민아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이 소년이 평생의 의지가 되어 줄 거라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배찬율이 또 다른 여자를 위해 다시 한번 불바다로 뛰어드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의 사랑은 변한 적이 없었다. 단지, 그 대상이 더는 그녀가 아닐 뿐이었다. 허민아는 몰려드는 인파를 따라 안전 구역으로 밀려났다. 멀리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불길에 삼켜진 건물을 바라보며 그녀의 심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세게 움켜쥐어진 듯 조여들었다. 얼마 후, 불길 속에서 비틀거리며 하나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배찬율이었다. 그는온몸이 상처투성이인 채 김예은을 끌어안고 마지막 순간에 뛰쳐나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김예은만은 온전히 감싸 보호하고 있었다. 불길을 벗어나자마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었지만 품에 안은 사람만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구조대원들이 재빨리 그들을 들것에 실었다. 허민아는 그 자리에 서서 구급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돌아서서 밤 속으로 들어들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모든 연락과 메시지를 차단했다. 배찬율을 병문안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짐을 정리하는 데에만 몰두했다. 정리를 마친 뒤, 그녀는 다섯 날 뒤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항공사에서 일정 확인 전화가 왔을 때 그녀는 차분히 대답했다. “네, 다섯 날 뒤로 예약돼 있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배찬율이 문간에 서 있었다.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얼굴은 음산할 정도로 어두웠다. “다섯 날 뒤에 어디 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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