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소유나는 잠시 멍해 있다가 안서영의 말을 다시 들었다.
“너희 부부가 언제까지 따로 살 수만은 없잖니. 원래는 너희를 본가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늙은이랑 같이 살기 싫어한다 싶어서 그만뒀단다. 내 속마음 알지? 난 네가 지후 애를 얼른 가져줬으면 해.”
안서영이 핵심을 꺼냈다. 소유나는 처음부터 동의했던 터라 잘 알고 있었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지후 씨가...”
소유나는 말끝을 흐렸다. 안서영이라면 이해할 거라 믿었다.
“걔는 신경 쓰지 마라.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결과만 좋으면 돼.”
안서영의 절박함은 문지후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암시했다.
그녀가 아이를 낳고 싶다고 해도 문지후가 허락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오늘 당장 지후 집으로 들어가렴. 이번 일은 이렇게 결정하는 거야.”
소유나는 속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문지후와 살다니, 전쟁이 따로 없을 게 분명했다.
“저야 당연히 좋죠. 그런데 지후 씨가...”
“신경 쓰지 마. 걔는 내가 설득할 거야. 어쨌든 너는 지후 아내잖니. 부부가 따로 살 수는 없지.”
더 말해 봤자 소용없었다. 결국 문지후가 자신을 내쫓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소유나는 그의 집 거실에 서 있었다. 남의 집에 잘못 들어온 듯 어색했다.
“유나는 네 아내야. 남편이면 책임을 져야지.”
안서영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문지후와 단둘이 남자 침묵이 어색하게 맴돌았다. 그는 식탁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문 채 금속 라이터를 돌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소유나는 그의 시선에 발끝이 땅을 파고들 지경이었다.
“대단하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더니 비웃듯 말했다.
“어머니를 등에 업었군. 아주 영리해.”
문지후의 비아냥을 듣고도 소유나는 변명 한마디 못 했다.
그의 눈에 자신은 돈만 밝히는 여자, 아이만 품으면 부잣집 며느리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고 믿는 그런 여자일 뿐이었다.
소유나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나갈게요.”
“나갈 필요 없어.”
문지후는 담배를 집어 입술에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뜻밖의 대답에 소유나는 잠시 멍해졌다.
문지후는 식탁에 한 손을 짚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렇게 애써 나한테 다가왔는데 내쫓아도 소용없겠지. 여기서 살려면 내 규칙을 따라.”
소유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요.”
“밤 10시 전에 무조건 집에 있어. 한밤중 소란은 질색이라.”
통금이라니 의아했지만 그녀에게 어렵지는 않았다. 친구도 약속도 드물었으니까.
“알겠어요. 또 있나요?”
그는 고개를 살짝 들며 담담히 말했다.
“이 집에서 아내가 해야 할 일, 다 해.”
소유나는 슬쩍 웃으며 묻었다.
“아이 갖는 일도 포함인가요?”
문지후의 손이 순간 떨리며 재가 식탁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소유나는 빙긋이 웃었다.
“꿈 깨.”
그는 담배를 비벼 끄며 쏘아붙였다.
“네네, 그냥 꿈이었어요.”
소유나는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살게요.”
“가식은 집어넣어. 억지로 꾸민 호감은 역겨워.”
“...”
소유나는 숨을 골랐다.
“진짜 호감일 수도 있잖아요?”
“뭘 보고?”
“지후 씨는 잘생겼고 몸매도 좋으니까요. 그런 사람은 누구든 좋아하기 쉽죠.”
“마음도 가볍네.”
“...”
그가 어떻게 말하든 대부분의 호감은 그 가벼움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소유나는 잘생긴 사람이 좋았다.
...
이튿날 밤, 문지후는 클럽 룸에서 와인잔을 흔들며 음울한 기색에 잠겨 있었다.
“그 여자를 집에 들이다니, 쉽지 않았네.”
허진서는 은테 안경을 밀어 올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웃었다. 조끼 정장을 입은 그는 야무진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해외에 있던 허진서는 문지후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금세 들었다. 일이 얽혀 돌아오지 못했지만, 사실 그 여자를 진작 보고 싶었다. 갓 귀국하자마자 그 여자가 문지후의 집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는 옷도 못 갈아입은 채 곧장 달려왔다.
“진 비서랑 자주 연락해?”
문지후가 낮게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불쾌함이 묻어났다.
허진서는 그의 와인잔을 낚아채 단숨에 비웠다.
“나는 그냥 친구 챙기는 거야.”
그는 원래 가십을 즐기는 타입이 아니었다.
문지후는 시큰둥하게 고개를 돌렸다. 집에 불청객이 늘었다는 생각에 미간이 더 깊어졌다.
허진서는 잔을 다시 채우며 툭 던졌다.
“그 여자한테 빠지지 마.”
문지후가 곁눈질했다.
“미쳤냐?”
허진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같이 사는 여자인데, 네 삶에 들어왔으면 네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도 금방이야.”
“헛소리하지 마.”
문지후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잘라 말했다.
허진서는 싱긋 웃었다.
“내가 입을 다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야.”
문지후가 차디찬 눈빛을 던지자, 허진서는 웃으며 술을 한 모금 더 넘겼다.
한편, 영상통화 화면 속에서 유연서는 팩을 붙인 채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너 그 사람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소유나는 식탁에 앉아 면을 후루룩 먹으며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 그래.”
“같이 살잖아. 불꽃 튀기기 딱 좋은 상황이야. 금방 감정 폭주할걸.”
“정말 아니야.”
소유나는 국물 한 모금 들이켰다.
“무릎에 앉아 봐도 밀어내더라. 내가 옷 다 벗고 앞에 서 있어도 안 흔들릴 사람이라니까.”
그 점만큼은 그녀도 확신했다.
문지후는 입으로는 큰소리치지만 막상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한다.
나아가 다른 여자라면 유연서도 장담 못 하겠지만, 소유나는 굳이 옷을 벗지 않아도 된다. 웬만한 남자라면 그녀와 한 공간에 있으면 금세 평정심을 잃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설령 뭔가 하게 돼도 먼저 못 버티는 건 나일 거야.”
소유나는 마지막 국물을 마시고 그릇을 내려놓았다.
“지후 씨 정말 잘생겼고, 몸도 좋잖아. 그런 사람이랑 아이를 가지면 멋질 것 같아.”
유연서는 피식 웃었다.
“그럼 네가 낳아.”
소유나는 휴지로 입을 닦으며 웃었다.
“돌아오면 한번 시도해 볼 거야.”
그때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자, 소유나는 급히 통화를 끊었다. 문지후 앞에서는 얌전한 편이 낫다.
문지후는 그녀를 보지 않고 외투를 벗어 걸며 안쪽으로 걸어갔다. 옷을 옷걸이에 걸고, 소매 단추를 풀고, 시계를 벗은 뒤 부엌에서 물을 따라 소유나의 등 뒤에 서서 마셨다.
‘내가 이 여자를 집에 들이다니.’
겉과 속이 다른 여자가 자신의 서류상 아내라니 생각할수록 신경이 곤두섰다. 문지후는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우고 침실로 향했다.
“지후 씨.”
그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소유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밝게 웃었다.
“오늘 밤... 같이 잘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