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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문지후가 경찰서에 들어섰을 때 소유나는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있었다. 머리를 높이 틀어 올린 채 얼굴에는 피로가 드리웠지만 허리는 전혀 구부러지지 않았다. 그 모습은 버려진 길고양이처럼 외로워 보였다.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소유나는 잠시 눈빛이 밝아졌지만, 그가 진우가 아니라 문지후라는 사실을 깨닫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연락한 사람은 진우였고, 출장 중인 유연서 대신 도움을 청한 것뿐이었다. 뜻밖에도 찾아온 이는 진우가 아닌 문지후였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곤란한 꼴은 이미 여러 번 보여 준 터라, 소유나는 그가 온 것이 어쩐지 불편했다. 문지후는 안쪽 사무실에서 서류를 처리한 뒤 나와 그녀를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한마디였다. 두 사람의 관계처럼 여전히 냉담했다. 소유나는 그의 외투를 안은 채 뒤따랐다. 조금 전 몸싸움 탓에 가방이 찢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경찰서를 나와 막 차에 오르려는 순간, 하준명이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 “야, 네가 소유나 남자냐?” 소유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창피함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문지후는 고개를 돌려 차가운 눈빛으로 하준명을 노려봤다. 하준명은 미친개처럼 집요했다. “무슨 일이지?” 문지후는 담담했다. 하준명은 그가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차림만 봐도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알아챘다. “하! 소유나, 네 안목이 이 정도냐? 왜 여자 같은 하얀 낯짝을 골라?” 문지후는 피부가 하얗고 잘생겨 예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또 맞아 볼래?” 소유나는 이를 갈았다. 하준명은 비웃으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저런 놈이랑 결혼하겠다고? 힘은 있냐?” 거친 말이 귀에 거슬렸다. 소유나는 손을 들어 올리려다가 문지후에게 손목이 붙잡혔다. “집에 가자.” 그의 눈동자에는 파문 하나 없었다. 그가 전혀 화를 내지 않자 소유나는 더 답답했다. “소유나, 네가 고른 건 이런 겁쟁이야!” 문지후가 여전히 무표정하자 하준명은 기세등등해졌다. “겉만 번드레하지 쓸모도 없겠네. 이런 인간이랑 결혼은 왜 해? 사진발 좋으니까?” 소유나는 막말을 퍼붓고 싶었지만, 문지후가 낮게 말했다. “말싸움은 소용없어.” 결국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입을 다물었다. 문지후가 차 문을 닫자 아무런 반응도 못 얻은 하준명은 더 격분했다. “겁쟁이 주제에 여자만도 못하네!” 운전석에 오르던 문지후는 자동차 너머로 하준명의 고함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여자보다 말이 많네.” 하준명이 깨달을 새도 없이 차는 이미 달려 나갔다. 백미러 속 하준명은 옆 나무를 걷어차며 분노를 삭였다. 밖은 네온으로 번쩍였지만, 차 안은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말을 꺼내고 싶던 소유나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먼저 말하지 않는 한 그녀가 말을 꺼내기는 어려웠다. 그에게 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호등 앞에서 멈춘 문지후는 전화를 걸었다. “처리해.” 소유나는 세 글자만 듣고 업무 지시쯤으로 여겼다. 차가 그녀의 아파트 앞에 섰다. 안전벨트를 푼 소유나는 품에 든 외투를 내려다봤다. “옷은 나중에 돌려줄게요.” 반나절 내내 품에 있던 외투였다. 이 정도면 씻은 보람이 없을 정도였다. 문지후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유나 씨, 눈썰미가 꽤 형편없네.” “...” 소유나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니까. “죄송해요, 나 때문에...” 문지후는 곁눈질로 그녀를 살펴보았다. 가식 하나 없는 본연의 그녀 같았다. “알면 됐어.” 그는 시선을 돌렸다. 소유나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문이 닫히자마자 차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외투를 껴안은 그녀는 맥이 풀려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한밤중, 전화벨이 소유나를 깨웠다. 받자마자 유연서의 들뜬 목소리가 쏟아졌다. “빨리 단톡방 봐, 빨리빨리!” 소유나는 눈을 비비며 단톡방을 열었다. 새 메시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 누가 이런 짓을 했냐고 묻고 있었다. 한참을 위로 올려 보니 영상이 하나 있었다. 영상 속 폐창고에서 하준명이 얻어맞고 있었다. 주먹과 발길질에 반격조차 못 하고 비명만 질렀다. 눈두덩이와 콧등이 시퍼렇게 부은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단톡방은 들끓었다. [이 각도 보니 때린 사람이 직접 찍었네.] [대체 누구 건드렸길래 저 모양이야?] [그동안 건드린 사람 많았잖아. 난 이렇게 될 줄 알았다니까.] 사람들은 하준명이 나중에 볼까 봐 겁내기는커녕 수군대며 열을 올렸다. 유연서가 또 전화를 걸어와 물었다. “누가 그렇게 한 건지 알아?” 소유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대답했다. “모르겠어.” “영상 올린 사람 보니까 벌써 방을 나갔더라. 실명도 아니라서 추적이 안 돼. 그래도 잘 맞았어, 속 시원하다. 걔는 원래 손봐야 했거든.” 소유나는 문지후가 내뱉은 처리하라는 한마디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 처리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두고 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영상을 보니, 그렇게 오만하던 하준명은 비명만 질렀다. 상대는 급소를 피해 가며 일방적으로 짓밟았고, 그 폭력은 고문이자 굴욕이었다.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한 소유나는 하준명이 맞는 장면만 떠올렸다. 카메라 뒤에 있던 사람을 문지후라 겹쳐 보며 밤을 버텼다. 동이 틀 무렵, 그녀는 문지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무슨 일이야?” 소유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물었다. “지후 씨가 사람 시켜서 하준명을 때리게 했어요?” 말을 뱉고는 숨을 죽였다. “응.” 그가 이렇게 곧바로 인정할 줄은 몰라 두 눈이 커졌다. “속상해?” 문지후가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물어본 거예요.” “다른 용건은?” 입술을 깨문 소유나는 더 말이 없었다. 그저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깔끔히 처리했어요? 영상이 퍼지면 들키는 거 아니에요?” 그녀의 걱정을 들은 문지후가 담담히 답했다.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 인간을 때린 것도 너 때문에 아니고.” “...”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검은 화면을 바라보며 소유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점심 무렵, 안서영에게서 식사 제안 전화가 왔다. 형식상 시어머니인 그녀는 겉으로는 온화했지만 매번 거절하기 어려운 강단을 숨기고 있었다. 안서영은 소유나를 보자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먹고 싶은 메뉴를 고르라며 감기는 좀 나았냐고 물었다. 며칠이나 지나서야 묻는 의례적인 안부였다. 소유나는 늘 그랬듯 얌전히 질문마다 답했다. 그러자 안서영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유나야, 이만 지후랑 같이 살아보는 게 어떻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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