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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소유나는 집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그사이 감기는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코는 막혔고 머리가 지끈거렸으며 목도 따끔했다. 그녀는 감기약을 삼키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혼자 누운 침대는 한참이 지나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새벽녘, 더는 버티지 못한 소유나는 두꺼운 패딩을 껴입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링거 바늘을 꽂은 채 멍하니 앉아 있자니 다른 환자들 곁에는 전부 누군가가 있어 부러움이 스쳤다. 고독에도 등급이 있다면 자신은 아마 10급은 될 테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링거를 맞으며 잠들기도 무서웠다. 억지로 눈을 뜨고 시계를 가끔 확인할 뿐이었다. 재검사를 위해 병원에 들른 문지후는 무심히 둘러보다 의자에 고개를 떨군 소유나를 발견했다. 흐트러진 머리, 손등에 꽂힌 링거 바늘, 그리고 주변과 격리된 듯한 고독감. 마침 소유나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다가 문지후와 눈이 마주쳤다. “지후 씨...”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불렀지만, 문지후는 못 들은 척 그대로 걸어가 버렸다. 진우 역시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고작 한순간의 마주침, 마치 환영 같았다. 소유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뭘 기대한 거야. 내가 걱정돼서 왔을 리가 없는 거잖아. 우스워지게 굴지 말자.’ ... 병원장실에서 나온 진우는 들뜬 얼굴로 떨리는 목소리를 눌렀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준비만 서두르시면 돼요” 그러나 문지후는 담담했다. 이미 가망 없는 선고를 받아들이고 난 뒤라, 기회라고 해도 결국 발버둥일 뿐이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다. 그는 뭐든 이런 마음으로 임했다. 다시 병원에서 지나며 문지후는 안을 힐끔 봤다. 소유나는 여전히 자리에 있었고 수액은 거의 떨어져 가는 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진 비서는 여기 남아 있어.” 문지후가 외투를 벗어 진우에게 건넸다. “저 여자 집까지 데려다줘.” “네, 대표님.” 진우는 대답하며 코트를 받아서 들었다. 문지후가 떠나자 진우는 소유나의 곁을 지켰다. 수액이 끝나자 간호사를 불러 바늘을 빼고, 소유나를 조심스레 깨웠다. 도통 예상 못 한 얼굴을 본 소유나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표님은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소유나는 이마에 손을 대고 숨을 골랐다. 잠시 앉아 있던 그녀는 일어나 약을 챙겼고, 진우는 뒤를 따라나섰다. 병원을 나오자 매서운 바람이 훅 끼쳐 왔다. 소유나는 몸을 웅크린 채 두 팔로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진우가 문지후의 코트를 내밀었다. 소유나는 코트를 힐끔 보더니 쉰 목소리로 웃었다. “지후 씨 어쩌자는 거예요?” “걱정하신 거겠죠.” 진우도 이유는 모르는 듯 말했다. 어쨌든 감기가 더 심해질까 봐 두고 간 거였다. 소유나는 코트를 받아 걸쳤다. 옷깃에서는 문지후 특유의 서늘한 향이 은근히 배어 나왔다. 차에 타자 따뜻한 히터 바람이 쏟아졌고,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 뒤 눈을 떴을 때 차는 이미 멈춰 있었고, 진우는 밖에서 통화 중이었다. 분명히 문지후와 통화하는 모양새였다. 그가 전화를 끝내자 소유나는 차에서 내렸다. 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이 코트, 대신 고맙다고 전해 줘요.” “길이 아직 좀 남았어요.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진우는 코트를 받지 않았다. 소유나는 다시 코트를 목까지 끌어올리며 물었다. “지후 씨한테 직접 전화해도 돼요?” “네.” 전화도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어서 한 대답이었다. “고마워요. 그럼 들어갈게요.” 소유나는 웃으며 아파트 단지로 걸어갔다. 집에 들어오자 유연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가 혼자 병원에 갔다고 한바탕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그 걱정이 오히려 따뜻했다. 잔소리가 끝나자 소유나는 진우가 데려다주고 문지후의 코트까지 남겼다고 말했다. “거리 두자더니 몰래 챙겨 주네? 무슨 수작이야?” 소유나는 소파에 누워 천장을 보며 코트를 흘끗했다. “아마 내 감기가 자기 때문이라 생각했겠지.” “생각보다 따듯한 사람이네.” 유연서는 문득 걱정이 들었다. “야, 그 작은 다정함에 혹하지 마. 내가 차가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지후 씨 남은 시간이 많지 않잖아.” 문지후가 세상을 뜨면 소유나가 감당 못 할까 봐, 유연서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두려웠다. 소유나는 훌쩍이며 웃었다. “괜한 걱정이야. 그런 일 없어.” 그녀도, 문지후도 사랑에 빠질 일은 없다고 단정 지었다. ... 소유나는 집에서 사흘 내리 잠만 잤다. 유연서는 출장 전날 하루 종일 밥을 해주고 떠났다. 나흘째 오후, 따뜻한 햇살에 기운이 돌아오자 소유나는 외출했다. 문지후의 코트를 드라이클리닝에 맡겼다가 찾아 나오는 길, 누군가 성큼 다가와 길을 막았다. 하준명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는 소유나가 든 쇼핑백을 아래위로 훑었다. 남자 코트가 든 걸 이미 본 듯했다. “소유나, 설명 좀 해야지 않겠어?” 소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쏘아봤다. “미쳤으면 병원이나 가.” “너 결혼했다면서? 나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그 남자 누구야?” 하준명은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연애만으로 상대를 다 알 수 없다는 걸 소유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의 이런 폭력적 기질을 몰랐으니까. 전에는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장난해?” 소유나는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와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준명은 물러서지 않았다. “언제부터 그 남자랑 놀아난 거야? 불러 봐. 내 여자 가로챈 놈 그냥 둘 것 같아? 죽여버릴 거야!” 소유나는 그의 저급한 말투에 질려 이를 악물었다. “적반하장도 정도껏 해. 바람피운 건 네가 먼저잖아.” “네가 좀만 일찍 돌아왔으면 그런 일 안 생겼어. 내가 너 보려고 호텔도 잡아 놨는데 안 와 주더라? 이게 연애냐? 나 남자야. 네가 안 해 주면 다른 여자 못 만나? 이거 다 네가 자초한 거야!” 그는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소유나를 몰아붙였다. 소유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얘기 더는 하고 싶지 않아. 의미 없어. 깔끔하게 끝내.” “그 영상 뿌려 놓고도 좋게 끝나길 바라?” 하준명이 막아서며 비웃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 “나랑 다시 사귀면 다 없던 일로 해 줄게.”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먼저 나온다. 소유나는 그를 멍청하다는 듯 한 번 흘겨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소유나!” 하준명이 그녀의 손목을 확 잡았다. “기회 주면 고마운 줄 알아.” 소유나는 그의 손을 노려보며 낮게 말했다. “놔.” “같이 가!” 하준명은 강제로 그녀를 끌었고, 소유나는 버둥대며 저항했다. 그는 소유나를 차 쪽으로 끌고 가 문을 열었다. 버틸수록 손아귀 힘은 더 세졌다. 문이 열리자 그는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유나는 들고 있던 코트를 그의 머리에 사정없이 내리쳤다. 가벼운 옷이라 타격은 없었고, 오히려 하준명은 더 흥분했다. 그가 거칠게 밀치자 소유나는 좌석에 넘어졌다. 그녀는 발로 걷어차며 버텼지만 하준명은 차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준명, 죽고 싶어?” 소유나는 분노에 휩싸여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었다. 휴대폰과 열쇠고리를 움켜쥐고 그의 머리와 얼굴을 마구 내려쳤다. 그는 그녀가 이렇게까지 거칠 줄은 몰랐고, 손에 칼이라도 있었다면 자신을 찔렀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선가 신고가 들어갔는지 경찰 사이렌이 울렸다. 하준명은 얼굴을 감싼 채 비명을 지르며 차 밖으로 물러났고, 소유나는 헝클어진 머리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차에서 내렸다. 하준명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렀고 얼굴은 멍투성이였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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