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문지후의 시선이 소유나의 빼어난 몸매를 훑으며 의미심장하게 머물렀다.
소유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가 여기서 정말로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하리라 믿었다.
그녀는 옷자락을 움켜쥐고 위로 걷어 올렸다. 가느다란 허리가 드러났고, 검은 니트 속 하얀 속옷 가장자리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때 문지후가 그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표정에는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소유나는 넘어질 뻔했으나 금세 몸을 추스르고, 마음속 솟구치는 기쁨을 누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문지후는 겉치레뿐인 그녀를 힐끗 보며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한다고 생각했다.
“꺼져!”
그는 이런 위선적인 여자가 역겨웠다.
소유나는 구원이라도 받은 듯 속으로는 환호했지만, 겉으로는 미련을 듬뿍 남겼다.
“지후 씨...”
“꺼지라고!”
문지후는 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망설임 없이 니트를 내려 입고 외투를 움켜쥔 소유나는 곧장 밖으로 나왔다.
클럽을 벗어나서야 깊은 한숨이 터졌다. 외투를 걸치지 않아도 전혀 춥지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 뛰었다.
자극적이고 위험했지만 무사히 빠져나온 것이 다행이었다. 목숨을 건진 기분이 든 그녀는 다음 날 유연서를 불러 호화로운 식사를 약속했다.
“진짜 간도 크네.”
유연서는 혀를 내둘렀다.
소유나는 그녀의 팔짱을 끼고 웃었다.
“부귀는 위험 속에서 얻는 거야.”
“정말로 그 사람이랑 하게 되면 어쩔 건데?”
“그 얼굴에 몸매, 집안까지 완벽하잖아. 호감 갖기는 쉽지.”
“응?”
유연서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사람이랑 아이를 낳아도 나쁘지는 않을 듯해. 애는 분명히 예쁠걸.”
“...”
유연서는 말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소유나가 해맑게 웃자 유연서는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상대가 또 이혼을 꺼내면 그대로 응하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결혼해서 시달리는 건 가정폭력이다. 가정폭력은 부부 갈등으로 분류돼서, 가해자에게 그렇게 강력한 제재도 들어가지 않는다.
“알겠어.”
소유나는 유연서가 자신을 걱정하는 걸 알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고 나니 유연서도 한결 차분해졌다.
두 사람은 웃고 떠들며 쇼핑몰을 걷다가, 소유나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유연서도 미간을 찌푸렸다.
“저 쓰레기!”
소유나는 하준명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감정 문제가 아니라, 생리적으로 혐오감이 올라왔다.
“가자.”
소유나는 유연서의 팔을 잡아 다른 방향으로 끌었다.
유연서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가 무서워? 난 아직 그 자식 혼내주지도 못했어.”
그러고는 소유나의 손을 뿌리치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유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무서운 게 아니라, 더러운 거랑 엮이기 싫어서 그래.”
유연서가 그 말을 듣고 침을 퉤 뱉었다.
“맞아, 역겨운 놈.”
두 사람은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소유나!”
하준명이 뒤쫓아와 앞을 가로막았다.
유연서는 소유나를 보호하려고 나섰다.
소유나는 유연서를 옆에 두고 하준명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뭐 하려고?”
“네가 날 못살게 굴었잖아. 그런데 내가 뭘 하겠어?”
체면이 땅에 떨어진 하준명은 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는 손을 뻗어 소유나를 잡으려 했다.
소유나는 재빨리 피했고, 하준명의 손끝도 닿지 않았다.
흥분한 하준명은 더욱 거칠게 손목을 낚아채려 들었다.
소유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고, 손바닥까지 얼얼했다.
하준명은 고개가 돌아간 채 놀란 눈으로 소유나를 노려봤다.
“소유나, 네가 감히 나를 때려?”
“내 손에 칼이 없는 걸 감사해. 또 귀찮게 굴면 네 집까지 찾아갈 거야.”
소유나의 눈빛에는 혐오가 가득했다.
소유나는 강한 상대를 만나면 더 세게 맞서는 성격이다. 건드리면 목숨도 내던질 기세다.
연애하면서 실제로 만난 건 얼마 되지 않는다. 대다수는 전화나 문자로 연락했을 뿐이다.
그때마다 소유나는 다정하고 상냥했기에, 하준명은 그녀를 요염하지만 순한 여자라 생각했다. 이런 불같은 기질은 예상 밖이었다.
‘이 여자는 길들여야 해.’
구경꾼이 늘어나자 유연서는 소유나를 끌고 빠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뒷말 듣는 쪽은 대개 여자였다.
하준명은 맞은 뺨을 문지르며 소유나의 뒷모습에 대고 소리쳤다.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지후와 진우가 방금 일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소유나가 하준명을 후려치는 장면까지 말이다.
진우는 놀란 표정이었다.
“저 남자, 하준명입니다. 구룡시에서 꽤 유명한 망나니예요. 며칠 전 그 무리에서 돌던 영상 기억하시죠? 이제 보니 그걸 찍어서 퍼트린 사람이 유나 씨네요.”
영상은 이미 하준명이 사람을 시켜 지웠지만, 진우는 복구해서 휴대폰을 문지후에게 내밀었다.
문지후는 영상을 확인하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진우가 입술을 다물고 기기를 거둔 뒤 말했다.
“대표님, 하준명은 좋은 놈이 아니에요. 유나 씨가 저렇게 망신을 줬으니 분명히 보복하려 들 겁니다.”
문지후는 몸을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일을 벌였으면 결과도 감당해야지. 보복당해도 자업자득이야.”
“...”
진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유나 씨는 대표님의 서류상 아내인데...’
그는 조심스레 따라붙어서 물었다.
“그럼 정말 이혼하실 겁니까, 대표님?”
문지후는 소유나의 위선적인 얼굴이 떠오르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응.”
...
소유나는 유연서의 집에 어둑해질 때까지 머물렀다. 유연서는 하준명을 욕하며 소유나가 보복당할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소유나는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편한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어쨌든 네 남편인데, 하준명을 좀 손봐달라고 해.”
문지후를 떠올린 순간 소유나는 살짝 겁이 났다.
“내가 진짜 그 사람을 남편으로 생각할 것 같아?”
“그럼 어쩔 건데?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살래?”
“걔가 감히 나 건드리진 못할 거야.”
소유나가 거듭 자신을 지키겠다 다짐하자, 유연서는 마지못해 그녀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그 집은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기 전에 마련해 준 작은 투룸이었다. 소유나에게는 충분했다.
샤워를 마친 뒤 소파에 누워 영상을 보려던 참, 낯선 번호가 뜨더니 벨이 울렸다.
소유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통화를 받았다.
“누구세요?”
“내일 아침 여덟 시 법원에 가서 이혼해.”
목소리를 듣고 소유나는 화면 속 번호를 다시 바라봤다.
‘이 사람이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지?’
그녀는 곧 깨달았다. 돈 많은 사람에게 번호쯤 찾는 건 쉬운 일이었다. 참으로 집요했다.
소유나는 다리를 꼬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평생 함께하려고 결혼했어요. 결혼했으면 이혼은 안 해요.”
“이혼 안 하면 과부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거야?”
“...”
그 말에 소유나는 기분이 확 상했다.
처음에는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당사자 입에서 직접 들으니 또 다른 기분이었다.
“지후 씨, 그렇게 말하지 마요. 요즘 의료 기술이 발달해서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어요. 지후 씨가 적극적으로 치료에 협조하고 긍정적인 마음만 유지하면 분명 좋아질 거예요.”
이건 그녀의 진심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말을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지후는 거실 통창 앞에 서서 소유나가 영혼 없이 말하고 있을 표정을 쉽게 떠올렸다.
“유나 씨, 더 창피해지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해.”
그가 이 결혼을 받아들일 뜻이 없다는 건 뻔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녀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누구라도 느낄 수 있다.
“나는 싫다고 했어요. 지후 씨 부모님께 직접 말씀드려서 허락받아 오세요. 허락해 주시면 그때 동의할게요.”
결혼에는 어느 정도 충동이 끼어들기 마련이고, 누구와 결혼해도 결과는 비슷할지 모른다. 그나마 그와 맺는 편이 더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문지후는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역시 영리하다. 부모님은 이 결혼이 마냥 좋기만 한데 반대할 리 없으니 말이다. 그럴수록 그녀의 계산이 더 미웠다.
“나랑 맞서는 게 그렇게 쉬울 것 같아?”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불쾌감이 스며 있었다.
소유나는 그가 두렵기는 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시간도 늦었고, 몸도 안 좋으니까 일찍 쉬어요. 생각이 정리되거나 부모님 설득이 끝나면 다시 연락해요. 잘 자요.”
그에게 말할 틈조차 주지 않고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낯선 숫자를 문지후라는 이름으로 저장하고 나니, 그의 창백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쯤 화가 머리끝까지 났을 것이다. 어쨌든 최대한 피해서 마주칠 일은 줄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이튿날, 안서영이 사람을 보내 소유나를 본가로 데려오겠다고 연락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