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부산에서 고태준과 심유나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소꿉친구의 정석 같은 커플이었다.
고씨 가문의 도련님이 심유나를 얼마나 금이야 옥이야 챙겼는지, 외국에 있던 송서영조차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으니까.
비록 지난 3년 동안 고 대표가 스승의 딸 때문에 아내를 홀대한다는 소문이 돌긴 했지만 송서영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남자의 지독한 책임감이 불러온 부작용일 뿐이었다.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아온 감정의 뿌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함께 자란 두 그루의 나무와 같아서 뿌리가 서로 엉겨 붙어 있기에, 억지로 갈라놓으려다가는 둘 다 큰 상처를 입게 될 터였다.
단순히 소통의 부재이거나 수완 좋은 내연녀의 방해 때문이라면, 이 결혼은 반드시 끝내야 할 일도, 끝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감정의 골이 워낙 깊어 자칫하면 변호사가 이간질하는 악역이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젯밤, 도현우가 그녀를 은밀한 방으로 안내했을 때 송서영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이 열리는 찰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창문 하나 없는 그 방의 벽 전체는 온통 그림들로 도배되어 있었고 선반마다 가득한 목조각상들은 전부 심유나였다.
포니테일을 한 모습, 교복을 입은 모습, 책을 품에 안고 고개 숙여 걷는 모습, 나무 그늘 아래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까지...
그것은 모두 열다섯, 열여섯 살 무렵의 심유나였다.
방 중앙에 놓인 조각상들은 칼자국 하나하나가 깊고 얕음에 차이가 있었지만, 심유나의 아주 미세한 분위기까지도 정확하게 포착해내고 있었다.
심지어 화가 났을 때 살짝 부풀어 오르는 뺨마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붓질 한 번, 칼질 한 번에 섬뜩할 정도의 집착이 묻어났다.
도현우는 유화 한 점 앞으로 걸어갔다.
그림 속 여자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아래 서 있었는데 그 뒷모습이 가냘프면서도 성스러웠다.
그것은 3년 전 심유나의 결혼식 장면이었다.
도현우는 손을 들어 손가락 끝으로 그림 속 면사포를 아주 천천히 쓸어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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