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해성 클럽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전기 배선 문제로 시작된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 올라가고, 짙은 연기가 몰아치는 가운데 강도현은 배서연만 찾아 헤매고 있었다.
막 VIP룸을 나서던 윤서하는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다시 방 안으로 넘어졌다.
그때 누군가 문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문이 철컥 닫히더니 안쪽에서 잠겨 버렸다.
윤서하는 놀라서 두 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살려 주세요. 문 좀 열어 주세요! 누구 없어요?”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바깥 출구만 향해 달아나느라 방 안에서 들려오는 윤서하의 목소리를 들을 겨를이 없었다.
곧 문틈 사이로 시커먼 연기가 스며들어 왔다.
매캐한 연기에 목이 타들어 가듯 기침이 쏟아졌다.
윤서하는 급히 겉옷을 벗어 코와 입을 감쌌다.
그리고 방 안을 둘러보다가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불꽃이 안쪽으로 번져오기 직전, 윤서하는 이를 악물고 그대로 몸을 던져 유리창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창문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 윤서하는 3층 높이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땅에 내동댕이쳐지는 통에 숨이 턱 막혔고 다리가 부러진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아파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럼에도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밖으로 빠져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배서연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그 옆에는 이미 의식을 잃은 강도현이 들것 위에 누워 있었다.
윤서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불안과 공포를 억누르며 비틀거리다가 마침 도착한 구급대에 의해 함께 구급차에 실렸다.
병원에 도착하자 윤서하는 자신의 상처는 전부 뒷전으로 밀어 두고,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강도현부터 찾았다.
강도현은 이미 수술실 앞으로 옮겨지고 있었고 두 다리에는 심한 화상으로 피가 흥건했다.
“도현 씨!”
윤서하는 거의 넘어질 듯 휘청거리면서 들것을 따라붙었고 눈앞에 비친 강도현의 얼굴을 다급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간신히 눈을 뜬 강도현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는 전혀 다른 이름이었다.
“서연아... 서연이는 어딨어? 괜찮아? 무사해?”
윤서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강도현은 힘없이 숨을 몰아쉬면서도 계속 중얼거렸다.
“서연이... 서연이 좀 보게 해 줘. 서연이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나도 안심할 수 있어...”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서둘러 들것을 밀어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강도현은 끝까지 배서연의 이름만 부르며 꼭 한 번만이라도 얼굴을 봐야겠다며 버티고 있었다.
윤서하는 애써 타이르듯 말했다.
“도현 씨, 제 말 좀 들어요. 지금은 상처부터 치료해야 해요. 화상 상태가 심해서 더 늦으면 안 돼요!”
하지만 강도현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고, 오로지 배서연이 무사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서연이... 나 서연이부터... 서연이... 좀 보여 줘.”
그 애타는 부름이 한 번, 두 번 이어질수록 윤서하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두 손을 꼭 쥐었다.
윤서하는 눈가가 서서히 뜨겁게 젖어 갔다.
강도현은 자신의 생사보다 배서연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고, 불길이 치솟는 그 순간에도 윤서하를 뒤에 남겨둔 채 배서연을 구하러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제 화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배서연만 찾고 있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윤서하에게는 차라리 죽는 것보다 더 잔인한 일이었다.
그때야 배서연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배서연은 들것 옆에 바짝 붙어 강도현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도현아, 나 괜찮아. 나 멀쩡해! 지금은 네가 먼저 치료받아야 해. 나 여기서 기다릴게... 응?”
몇 마디 다정한 말이 오가자 그제야 강도현은 얌전히 눈을 감고 수술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 순간, 의사가 서류 한 장을 들고나왔다.
“보호자 계십니까? 수술 동의서에 서명해 주셔야 합니다.”
윤서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보다 배서연의 손이 더 빠르게 뻗어 나왔다.
배서연이 순식간에 동의서를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
“제가 보호자예요. 서류 주세요. 제가 사인할 자격이 있습니다. 서류는 저한테 주세요.”
서명하면서 배서연은 슬쩍 돌아서서 윤서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윤서하는 강도현과 비밀 결혼한 사이였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아내지만 누구 앞에서도 떳떳하게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반면, 배서연은 강준호의 미망인이라는 이름으로 또 강도현의 새어머니라는 신분으로
아무렇지 않게 강도현의 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상 그 누구도 윤서하가 강도현의 아내라는 사실을 몰랐다.
심지어 강도현조차 그 사실을 잊고 있는 듯했다.
윤서하는 힘이 빠진 듯 고개를 떨구고 대기실 긴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가슴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울음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배서연이 다시 다가와 마치 승리 선언하듯 입을 열었다.
“이제는 알겠지? 내가 도현이 마음속에서 어떤 자리인지. 도현이는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사람이야. 너랑 결혼한 것도 결국 나하고의 관계를 가리기 위한 방패였을 뿐이지. 오늘 일부러 이런 꼴을 너한테 보여준 건, 네가 완전히 체념하라고 한 거야. 인제 그만 포기해. 더는 기대할 것도 꿈꿀 것도 없어.”
윤서하는 눈을 감고 겨우겨우 눈물을 삼켰다.
“당신은... 도현 씨가 이렇게까지 몸을 던지는 걸 보는 게 좋아요? 그렇게까지 해서, 당신을 위해 살고 죽는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좋냐고요?”
배서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저 도현이가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해 주길 바랄 뿐이야. 나도 내 전부를 걸고 도현이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윤서하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왜 처음에 도현 씨를 버리고, 도현 씨의 아버지에게 시집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