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박해
하종수는 덕양왕이 떠나자 불안해졌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태자 독고수형을 바라보았다. 독고수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독고수형은 하종수가 자신의 딸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할 정도로 무능할 줄은 몰랐다. 그는 그 자리에서 더는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차가운 얼굴로 말을 타고 떠났다.
덕양왕 일행도 떠나고 태자도 떠나자 다들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고 잠시 뒤 저택 앞이 텅 비었다.
하종수와 영용부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부인이 저택 안에서 나오며 위엄있게, 또 기품 있게 사람들을 향해 사과했다.
“오늘 일로 시끄럽게 굴어서 송구합니다. 다들 먼저 돌아가시지요. 제가 추후 직접 찾아가서 사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인이 축객령을 내렸고 더는 구경할 것도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꽃가마에 타기를 거부하여 덕양왕의 체면을 깎은 하지연이 앞으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은근히 걱정했다.
게다가 하지연이 꽃가마에 타기를 거부했으니 황후는 그녀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황후의 수단을 생각한다면... 아마 죽을지도 몰랐다.
손님들 중에는 잘생긴 중년 사내가 있었는데 그는 하지연을 힐끔거리다가 마차를 타고 떠났다.
그가 바로 안성왕이었다. 과거 그는 원씨를 사모했었는데 지금까지도 혼인하지 않고 있었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그는 원씨를 위하여 평생 아무와도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맞은편 누각에 있던 사내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구경이 끝났으니 이만 입궁하자꾸나.”
호위무사가 서둘러 그를 뒤따랐다.
“하씨 가문의 아씨는 죽게 되겠지요?”
사내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후마마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겠지. 아마 두 시진 안에 저 여인에게 입궁하라고 명령을 내릴 것이다. 나랑 내기할 것이냐? 나는 저 여인이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죽을 거라는 것에 두 냥을 걸겠다.”
호위무사는 웃으며 말했다.
“네. 좋습니다. 오늘 하씨 가문의 아씨는 꽤 현명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명석한 여인인 것 같으니 저는 그 아씨가 이틀은 더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것에 걸겠습니다.”
그래도 결국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대부인은 손님들이 전부 떠나자 싸늘한 얼굴로 명령을 내렸다.
“다들 저택으로 돌아가거라. 그리고 저택 문을 닫거라!”
하지연은 사람들에게 끌려가 마당에 내팽개쳐졌다. 대부인이 입을 열기도 전에 하종수는 하지연에게 발길질하면서 씩씩대며 화풀이했다.
“이 천박한 것! 너는 오늘 내 얼굴에 먹칠을 했다. 죽여도 시원치 않은 것!”
하지연은 이미 심하게 다친 상태라 그의 발길질을 견딜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 하지연은 하종수를 죽이고 싶은 마음에 몇 번이나 반지를 쥐었지만 끝내 참았다.
대부인이 명령을 내렸다.
“이제 와서 때려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덕양왕 마마는 이미 입궁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황후마마의 분노를 잠재워야 할지를 고민해 보거라.”
하종수는 그 일 때문에 골치가 아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대부인에게 물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부인은 하종수를 흘겨보았다.
“뭘 어쩌겠느냐? 이 일은 반드시 누군가 나서서 책임져야 한다. 그러니 모든 죄를 저 천박한 것에게 뒤집어씌우면 되지 않겠느냐? 황후마마와 덕양왕 마마는 누군가에게 벌을 주는 것으로 체면을 세우려고 할 것이다. 너를 심하게 꾸짖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지만 종수야, 이렇게 중요한 일에 아무런 대비책도 세우지 않더니 결국엔 이 꼴이 났구나.”
하종수는 대부인에게 혼나자 또 한 번 화가 치밀어올라 하지연에게 발길질하면서 말했다.
“이 계집애가 그런 짓을 할 줄 누가 알겠습니까? 어제 분명히 저와 약속까지 했었는데 말입니다.”
영용부인이 수심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닌 듯합니다. 저 계집애를 희생하면 황후마마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까요?”
“일단 뭐든 해봐야지. 황후마마께서는 틀림없이 하지연을 궁으로 불러들여 죄를 물을 것이다. 너희는 대의를 위해 딸을 희생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대부인이 매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종수가 대답했다.
영용부인은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하지연을 힐끗 본 뒤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모두를 속일 정도로 교활한 아이일 줄은 몰랐습니다.”
영용부인이 말을 마치자마자 하혜원이 달려 나왔다. 그녀는 아직 혼인하지 않은 소녀라 저택 밖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뒤늦게 하인의 보고를 들은 그녀는 하지연이 꽃가마에 타는 걸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저택 앞에서 큰 소란을 일으켜 태자의 체면을 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혜원이 씩씩대며 달려 나왔다. 하지연이 맞아서 바닥에 쓰러진 걸 본 하혜원은 다짜고짜 하지연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위에 앉더니 하지연의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 것인지 계속하여 하지연을 때리려고 했다. 그런데 하지연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하혜원을 오른쪽으로 밀친 뒤 그녀의 귀를 세게 깨물었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였음에도 불구하고 하지연은 놔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연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혜원은 아파서 비명을 내지르며 두 손과 두 발로 하지연을 때렸다. 그럼에도 하지연은 놓아주지 않았다.
영용부인은 그 광경을 보더니 화가 나서 몸을 부들부들 떨며 하인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어서 떼어놓지 않고 뭐 하느냐?”
하지연은 하인들에게 끌려갔고 영용부인은 하지연의 뺨을 몇 대 때렸다. 힘을 얼마나 썼는지 손이 다 저릴 정도였다.
하지연은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습니다. 더 때리세요. 자꾸 이렇게 못살게 구시면 저는 다 죽자는 생각으로 모두를 구렁텅이에 빠뜨릴 것입니다.”
하종수는 하지연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부들부들 떨며 역정을 냈다.
“지금 당장 위패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거라.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일어날 수 없다. 황후마마께서 따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쭉 무릎 꿇고 있거라.”
고개를 든 하지연의 눈빛에서 냉담함과 결연함이 보였다. 하지연의 이마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섬뜩했다.
하인 몇 명이 자신을 끌고 가려고 하자 하지연이 차갑게 말했다.
“감히 내 몸에 손을 대려는 것이냐?”
하인들은 갑자기 사나워진 그녀의 모습에 겁을 먹고 가까이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연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음산한 눈빛으로 하종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당신이 저지른 짓들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말을 마친 뒤 그녀는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사당으로 향했다.
그녀가 지나는 곳마다 떨어진 피가 마치 활짝 핀 꽃처럼 보였다. 가녀린 뒷모습이지만 아주 꼿꼿했다. 하지연은 주먹을 꼭 쥐고 마음속 괴로움을 견뎠다. 그것은 그녀의 감정이 아니라 몸의 원래 주인의 머릿속에 남은 감정이었다. 몸의 원래 주인은 늘 아버지의 사랑을 바랐으나 그 바람은 그녀가 죽기 직전까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연은 그녀를 위해 반드시 복수할 생각이었다.
하종수는 아주 잠깐이지만 넋을 잃었다. 그는 하지연의 눈빛에 조금 겁을 먹었다.
하혜원은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돌아갔다. 하지연이 조금 더 힘을 주었다면 그녀의 귀를 물어뜯었을지도 몰랐다. 하혜원은 하지연이 죽도록 미워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
대부인은 시선을 들며 독사와도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잘 듣거라. 황후마마께서는 틀림없이 하지연의 죄를 물으려고 할 것이다. 만약 하지연이 살아서 출궁한다면 사흘 뒤 입궁하여 황후마마께 하지연이 급병에 걸려 죽었다고 전하거라. 그렇게 하면 황후마마께서 네 마음을 알아주실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대부인의 말대로 황궁 쪽에서는 책임을 질 사람이 필요한 것뿐이다. 누군가 죽는다면 황후의 분노도 당연히 잠재워질 것이다.
하지연은 하씨 가문 조상님들의 위패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위패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위패들이 그녀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는 듯했다.
하지연은 또박또박 말했다.
“두고 보세요. 제가 하씨 가문을 어떻게 뒤집어엎을지, 어떤 방식으로 죽은 하지연을 위해 복수할지 말입니다.”
조금의 여지도 느껴지지 않는 무자비하면서도 결연한 목소리였다.
하지연은 손가락에 낀 탈혼환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그녀와 다른 시대를 살던 사람의 몸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탈혼환이 무엇 때문에 그녀를 따라왔는지 그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오늘은 반격할 수 없었던 게 아니라 반격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녀의 능력으로 하씨 가문과 맞서 싸우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하지연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관문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 관문을 넘으려면 탈혼환과 그녀의 의술을 이용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