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입궁
하지연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오월의 날씨는 무더운 편이었고 강한 햇빛이 하지연의 머리 위로 내리쬐었다. 이마 위 피는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대신 채찍을 맞았던 곳에 땀이 흐르니 화끈거리며 아팠다.
한 시진 내내 무릎을 꿇고 있으려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하지연의 몸이 이리저리 휘청였다.
하지연을 감시하던 노파는 하지연이 무릎을 제대로 꿇지 않자 그녀에게 발길질했고 그 바람에 하지연은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기절할 뻔했다.
하지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더니 노파를 향해 발을 뻗었다. 노파는 하지연이 갑자기 발을 뻗자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게 되었다.
노파의 머리가 땅과 부딪치는 순간, 하지연이 팔을 뻗어 노파의 목을 조르면서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괴롭히려고 드는 것이냐?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구나!”
“이...”
하지연을 바라보는 노파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보였다. 노파는 한참 뒤에야 무섭지 않은 척 큰소리를 쳤다.
“정승 나리께서 제게 아씨를 감시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씨께서는 정승 나리의 명령을 어기실 생각입니까?”
하지연은 차갑게 콧방귀를 뀌면서 노파의 팔 위에 무릎을 꿇으며 무릎에 힘을 꾹 주었다. 노파는 아파서 연신 비명을 질렀다.
하지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내게 위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으라고 하셨지. 나는 아버지의 명령에 성실히 따르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 것이냐?”
노파는 엄청난 통증에 시달렸다. 결국 노파는 한발 물러나며 애원했다.
“아씨,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연은 꼼짝하지 않고 노파의 팔 위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신시쯤 되자 궁에서 궁녀 두 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황후가 하지연을 궁으로 불러들였다는 말만 했다.
‘드디어!’
하지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었다.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궁녀들이 하지연을 데리고 떠날 때 영용부인은 웃는 얼굴로 하지연의 앞으로 걸어가 손을 뻗어 하지연의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며 말했다.
“입궁하여 황후마마를 뵐 텐데 이렇게 초라한 행색으로 갈 수는 없지.”
영용부인은 하지연의 팔뚝을 만지는 척하며 그녀를 힘껏 꼬집었다. 영용부인은 증오 가득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추며 하지연을 협박했다.
“만약 네가 궁에서 죽지 않는다면 내가 아주 비참한 꼴로 죽여주마.”
하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용부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하지연이 온 힘을 다하여 따귀를 때린 탓에 영용부인은 바닥에 풀썩 쓰러지게 되었다.
하지연은 또박또박 말했다.
“제가 할 말입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뒤 하지연은 몸을 돌려 두 궁녀를 향해 말했다.
“안내를 부탁드리겠소.”
두 궁녀는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 모두 의아했다. 비록 하지연은 초라하고 비참한 꼴을 하고 있었지만 아주 당당하고 기세가 남달랐다. 오히려 그녀에게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하지연은 입궁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영용부인은 뺨을 부여잡고 원망스러운 눈길로 하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의 수모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지연이 정말로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녀는 백 배, 천 배로 돌려준 뒤 하지연을 죽일 것이다.
궁에서는 하지연을 위해 마차를 준비해 주었다. 그러나 하지연은 마차에 앉을 수가 없었다. 궁녀는 하지연에게 마부의 옆에 앉아야 한다고 일렀다.
눈치 빠른 백성이라면 황궁의 마차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상처가 가득한, 빨간색의 혼례복을 입고 있는 여인도 알아보기 쉬웠다.
오늘 구경하러 갔던 사람들이 적지 않아 빠르게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다들 정승 댁 아씨가 꽃가마에 타는 걸 거부하여 덕양왕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지연이 배짱이 좋다고 했고, 누군가는 그녀가 멍청하다고 했다. 그러나 하지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 모두 하지연이 입궁하게 되면 결말은 하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덕양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곧 황후의 체면을 짓밟는 일이었다. 그 일로 하지연의 목을 베도 지나치지 않았다.
하지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앞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하지연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눈앞의 모든 것이 꿈인 것만 같았고 심지어 태양마저 흐릿하게 보였다.
마차는 잘 닦인 길을 달리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마치 죽음을 재촉하는 벨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연 역시도 오늘 혼인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 예상했다. 그러나 가장 나쁜 결말도 덕양왕과 혼인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덕양 댁에는 첩만 십여 명이었는데 그중 반 이상이 불구였다. 조사에 따르면 3년 사이 덕양 댁에서 시체가 되어 실려 나간 첩만 해도 스무 명이 거뜬히 넘는다고 했다.
덕양왕은 미친 사람이었다.
경성의 훌륭한 가문들 중에 자신의 딸을 덕양 댁에 시집보내려고 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하여 덕양왕은 여태 정실부인을 맞지 못했다.
덕양왕 본인도 보잘것없는 가문의 딸을 정실부인으로 맞고 싶지는 않았다. 하종수와 술을 마시던 덕양왕은 본래 농담 삼아 얘기를 꺼낸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하종수가 술김에 자신의 딸을 그에게 시집 보내겠다고 동의했다. 덕양왕이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잠시 뒤 덕양왕은 반드시 궁에 있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지연의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연은 탈혼환을 만지작거리면서 속으로 묵묵히 생각했다.
마차가 황궁 서문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뒤 궁녀가 하지연에게 말했다.
“황후마마께서 6월 19일은 관세음보살의 탄생일이니 태후마마의 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5월 19일부터 입궁한 모든 명부와 귀녀는 반드시 서문에서부터 시작하여 세 걸음마다 무릎을 한 번 꿇고 아홉 걸음마다 머리를 한 번 조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연은 궁녀를 바라보며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황후마마께서는 효심이 참으로 지극하시군.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소. 앞으로 나도 황후마마를 본받아야겠소.”
궁녀는 덤덤히 대꾸했다.
“그러면 지금부터 시작하시지요.”
하지연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황후가 일부러 이렇게 고된 일을 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세 걸음마다 무릎을 한 번 꿇고 아홉 걸음마다 머리를 한 번 조아리는 것은 태후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머리를 조아릴 때면 성의를 보이기 위하여 반드시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힘주어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두 궁녀가 하지연의 뒤에서 구령을 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꿇으세요. 일어나세요. 한 걸음, 두 걸음...”
하지연은 그들의 구령에 따라 무릎을 꿇어야 할 때는 쿵 소리가 나게 꿇고 머리를 조아릴 때는 퍽 소리가 나게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을 때는 천천히 꿇는 게 아니라 쿵 소리가 나게 꿇어야 했다.
만약 쿵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궁녀가 차가운 얼굴로 다시 무릎을 꿇으라고 했고, 머리를 조아릴 때 퍽 소리가 나지 않으면 다시 머리를 조아리라고 했다.
서문에서부터 후궁까지는 겨우 수백 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지연의 이마는 부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두 무릎은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그러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흐릿해지기 시작하면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궁녀들의 목소리는 한없이 아득하게 들리다가도 마치 바로 옆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크게 들리기도 했다.
이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반드시 견뎌야 했다. 견디지 못한다면 오늘 그녀는 또 한 번 죽게 될 것이다.
하지연은 죽음이 두려웠고 살고 싶었다. 오직 살아있어야만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무릎에서 피가 줄줄 흘러도 반드시 꿇어야만 했다.
그 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연은 몇 번이 기절할 뻔했으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버텼다. 반드시 버텨야만 했다.
하지연은 분노와 증오를 숨기며 최대한 경건하고 또 평화로운 기색을 유지했다.
드디어 황후가 있는 정녕궁에 도착했다.
하지연은 온몸이 땀에 젖었고 땀과 붉은 피가 섞여서 함께 흘러내렸다. 볼품없게 변한 혼례복을 입은 하지연은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워 보였다.
“아씨, 일단 무릎 꿇고 계시지요. 황후마마께서는 지금 섭정왕마마와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대화가 끝나면 아씨를 불러들이실 겁니다.”
궁녀가 덤덤히 말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주황빛으로 물들었던 구름이 서서히 노란색이 되어갔다.
하지연은 꼿꼿한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떨지 않기 위해 온몸의 힘을 쥐어짜 냈다. 그래서 추운지, 더운지, 아니면 아픈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머리를 조아리느라 부은 이마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고 그 피들은 땅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하지연은 마치 조각상처럼 아주 평온한 얼굴로 그곳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약 반 시진 뒤, 허리를 제대로 펴는 것조차 힘들 때쯤에야 궁녀가 안에서 걸어 나오며 말했다.
“아씨, 황후마마께서 부르십니다.”
하지연은 공손히 말했다.
“고맙소.”
하지연은 힘겹게 일어났다. 두 다리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통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연은 몇 번이나 휘청이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