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밤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는 휴연각, 이곳은 안영시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사교 클럽이다.
배도현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다른 한 손은 파일 봉투를 흔들고 있었다.
검은 셔츠의 칼라가 느슨하게 풀려 있어 전반적으로 무심하고 방탕아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을 가진 재벌 2세처럼 말이다.
차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함영민이 즉시 다가갔다.
“대표님.”
배도현을 7년째 모시고 있는 함영민은 배도현의 표정만 봐도 오늘 밤 거래가 성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배도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파일 봉투를 함영민에게 던졌다.
그 안에는 화서 제약의 지분 25%가 들어 있었다.
“오늘부터, 화서 제약은 배씨 성을 달게 됐어.”
배도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평소와 같은 느긋한 말투로 말했지만 말 속에는 당당한 오만함이 가득했다.
“나 배도현의 배씨야.”
함영민이 말했다.
“내일이면 큰 도련님이 이 소식을 듣고 화낼 겁니다. 화서 제약을 반년 넘게 노려왔는데도 못 가져갔으니... 그런데 배 대표님, 평소 국내 제약 업계에는 손도 대지 않으시던 분이 왜 갑자기 화서 제약에 관심을 가지신 거죠?”
배도현이 함영민을 힐끗 쳐다보자 순식간에 밀려오는 상위자의 위압감에 함영민은 등골이 서늘해져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말이 많았습니다.”
재빨리 걸어가 뒷좌석 차 문을 연 함영민은 문득 다른 한 가지 일이 떠올랐다.
“대표님, 병원 쪽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송해인 씨가 계신 병실 층의 CCTV와 엘리베이터는 모두 꺼져 있으니 바로 가셔도 됩니다.”
배도현은 몇 년째 해외에 거주하고 있었고 귀국할 때마다 매우 조용히, 며칠만 머물다가 일을 마치면 떠났다.
하지만 변함없는 것은 귀국할 때마다 안영시에 들러 한 병원을 찾고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식물인간 상태의 여자였다.
한 번은 함영민도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용기를 내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표님, 그 송해인 씨라는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그때 서류를 보고 있던 배도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가볍게 한마디 내뱉었다.
“어리석은 여자일 뿐이야.”
함영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리석은 여자라면서 왜 매년 귀국하면서까지 안영시로 돌아와 그녀를 보러 가는 걸까?’
하지만 함염민은 감히 묻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배도현은 평소와 달랐다.
“앞으로는 그럴 필요 없어.”
함영민은 살짝 놀랐지만 역시나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호텔로 모실까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배도현은 차에 앉은 뒤 눈을 감은 채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미간에는 피곤함이 서려 있었다.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며 가로등 불빛이 반쯤 내려진 창문을 통해 스며들면서 남자의 입체적인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다.
“함 비서.”
배도현이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튼 빌리지를 청소하라고 해. 내일 밤부터 그곳에 들어갈 거야.”
함영민은 놀라면서도 기뻤다.
“대표님, 드디어 그곳에 머무르기로 결심하신 겁니까!”
배도현은 고개를 들어 올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란 가로등 불빛은 마치 7년 전 그날 공항에서 본 노을과 똑같았다.
‘송해인, 벌써 7년이 지났네.’
...
침대에 누운 송해인은 문밖 한은찬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들렸다.
병원에 누워있던 5년 동안 이 발소리를 너무 많이 들었다.
처음에는 기대감으로 가득 찼지만 나중에는 고통과 증오만이 남았다.
딸깍.
문이 열리는 순간 송해인의 얼굴에 가득했던 증오는 순식간에 부드러움으로 바뀌었다.
“은찬아, 일 다 끝났어?”
“응.”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한 한은찬은 침대 옆으로 다가와 송해인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왜 아직도 안 잤어? 나 때문에 깬 거야?”
한은찬의 흰 셔츠 깃에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본 송해인은 머릿속으로 한은찬과 임지영이 뜨겁게 키스하고 임지영이 그의 품에 안겨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는 장면을 그릴 수 있었다.
“이제 눈 감고 쉬어.”
송해인을 달랜 한은찬은 몸을 숙여 밤인사 차원의 키스를 하려 했다.
순간 송해인은 그의 몸에서 임지영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방금 다른 여자와 키스한 입으로 자신에게 키스하려 하다니!
“우웩...”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혐오감에 송해인은 한은찬을 밀쳐내며 헛구역질을 했다.
“왜 그래, 해인아?”
한은찬은 극도로 긴장한 듯했다.
“지금 바로 도 선생님에게 전화할게!”
걱정하는 모습은 마치 완벽한 남편처럼 보였다.
하지만 표정에 스쳐 지나간 냉담함과 혐오는 뚜렷이 볼 수 있었다.
송해인은 다시 한번 한은찬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괜찮아, 은찬아.”
정신을 가다듬은 송해인은 손을 더듬어 한은찬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랬어. 배가 고팠나 봐.”
송해인이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모습을 본 한은찬은 이 익숙한 동작에 잠시 멍해졌다.
한은찬의 기억 속, 예전의 송해인은 종종 이런 행동을 했다.
한은찬의 걸음이 빠르면 송해인은 힘들어하다가 애교를 부리며 그의 옷자락을 잡곤 했다.
“은찬아, 기다려줘...”
머릿속에 잠깐 추억이 스친 한은찬은 입가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띠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따뜻한 거라도 끓여줄까?”
바로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송해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직접 끓여준 국수가 먹고 싶어.”
한은찬은 전에 송해인을 위해 두 번 정도 국수를 끓인 적이 있었다.
“그래.”
한은찬은 대답한 뒤 침실을 나갔다.
한은찬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송해인은 즉시 침대 반대편의 벽 쪽 테이블로 기어가 한은찬이 방금 들어오며 테이블 위에 놓아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비밀번호는 여섯 자리, 송해인의 기억에 한은찬의 비밀번호는 그가 스카이 그룹 이사가 된 날짜였다.
하지만 입력해보니 틀렸다는 표시가 나왔다.
‘비밀번호를 바꾼 걸까?’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깨물며 잠시 생각하던 송해인은 두 아이의 생일을 입력해보았다.
역시 틀렸다.
그 순간 화면 상단에 카톡 메시지 알림이 떴다.
임지영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대표님, 오늘은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생일이었어요. 두 아이들과 함께 생일을 보내줘서 정말 감사해요.]
뒤이어 하트 모양의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 병원 앞에서 임지영과 두 아이가 한은찬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한은찬은 병원에 오기 전 두 아이를 데리고 임지영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눈을 질끈 감은 송해인은 마음이 싸늘해졌다.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은찬과 함께한 시간들, 그는 단 한 번도 송해인의 생일을 챙겨준 적이 없었다. 유일하게 챙겨준 그 한 번도 송해인이 한씨 가문의 가주에게 빌붙어 억지로 얻어낸 것이었다.
송해인이 한은찬에게서 얻지 못한 관심과 배려를, 다른 여자는 너무나도 쉽게 얻고 있었다.
6자리 비밀번호를 바라본 송해인은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망설이며 임지영의 생일을 입력해보았다.
그 순간 화면 잠금이 풀렸다.
멍해진 송해인은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
“한은찬, 임지영에게 정성을 다하는구나...”
한은찬의 카톡을 열어보니 임지영은 대화 목록 최상단 ‘즐겨찾기’에 있었다.
그리고 송해인, 정실부인은 이미 채팅 목록에서 사라진 상태이었다.
5년... 지난 5년 동안, 한은찬은 겉으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 세상 가장 좋은 남편 행세를 하면서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았지만 사실 송해인을 죽은 사람처럼 여기고 있었다.
마음이 차가워진 송해인은 연락처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다.
한은찬이 저장한 송해인의 번호, 연락처 이름은 예상대로 ‘송해인’ 단 세글자뿐이었다.
한은찬과 임지영의 채팅창을 열어보니 임지영이 방금 사진 몇 장을 더 보낸 것을 보았다.
그것은 오늘 저녁 함께 식사하며 찍은 단체 사진들이었다.
임지영은 그 어느 사진에서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생일 왕관을 쓰고 진희와 준서를 안은 채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는 임지영, 그리고 한은찬은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네 식구,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의 개 같은 놈들이었다.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는지 위로 스크롤 했지만 다른 대화는 없었다.
한은찬은 평소 매우 조심스러운 성격이라 사람들 앞에서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임지영과의 이전 대화 기록들을 모두 삭제해둔 것이다.
송해인은 임지영이 보낸 사진 몇 장을 그대로 자신에게 전송했다.
임지영이 직접 증거를 가져다줬으니 성심성의껏 받은 것뿐이다.
그 후 송해인은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임지영의 메시지를 ‘읽지 않음’으로 설정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마친 후 한은찬의 휴대폰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벽 구석에 던져진 결혼사진에 시선이 스친 순간 송해인은 잠시 멈칫했다.
사진 속 송해인의 얼굴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송해인은 그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하게 웃고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진 속 한은찬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한은찬은 송해인을 사랑하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한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한은찬은 처음부터 끝까지 송해인을 이용했을 뿐이었다.
송해인은 손을 들어 눈가에 맺힌 눈물 자국을 닦아냈다.
“한은찬.”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마치 오랜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널 사랑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