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만약 스카이 그룹의 자산이 안영시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 수 있다면 배씨 가문은 안영시 상위 10위 안에 드는 기업들을 모두 합쳐도 배씨 가문에 미치지 못할 정도의 존재였다.
미간을 찌푸린 한은찬은 약간 의아해했다.
“제약 분야는 배씨 가문에서 원래 손도 대지 않았잖아? 갑자기 왜 화서 제약을 인수한 거지?”
주명욱은 두 손을 벌려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건 잘 모르겠어. 아마도 제약 산업이라는 분야가 너무 매력적으로 보였나 보지. 돈을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말을 마친 주명욱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 했다. 그런데 문 앞까지 걸어간 뒤 다시 뒤돌아 한은찬에게 말했다.
“아, 그리고 윤시진이 오늘 밤에 귀국해. 윤시진 생일이기도 하니까 저녁 7시에 퓨처 레스토랑에서 생일 쇠어 주자.”
윤시진은 그의 대학 시절 룸메이트 중 한 명이자 오랜 친구였다. 그런 친구의 생일 파티에 불참할 수는 없는 노릇, 한은찬은 잠시 생각한 뒤 휴대폰을 들어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
“대표님.”
전화를 받은 것은 유현숙이었다.
“해인이는요?”
“사모님은 방에 계십니다.”
“전화 바꿔줘요.”
거실의 유선 전화와 방 안의 전화는 연결되어 있었기에 유현숙은 바로 전화를 돌렸다. 거의 30초 가까이 기다린 한은찬은 인내심이 바닥날 무렵 송해인이 전화를 받았다.
예전이라면 송해인은 전화를 즉시 받았을 것이다.
“은찬아, 무슨 일 있어?”
한은찬의 목소리가 다소 불쾌하게 들렸다.
“뭐 하고 있었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송해인은 자신의 다리 위에 꽂힌 수많은 침을 바라보며 솔직히 말했다.
“다리에 침 맞고 있어. 그래야 빨리 걸을 수 있지.”
송해인은 계속 연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다리는 빨리 회복되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의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테니까.
송해인은 의료계 명문가 출신이었다. 밥 먹는 숟가락을 혼자 들 때부터 침을 잡을 줄 알았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혈 자리를 찾는 것쯤은 송해인에게 식은 죽 먹기였다.
한은찬은 별다른 의심 없이 말을 이었다.
“오늘 밤 나...”
말끝을 흐리던 한은찬은 잠시 망설이다가 거짓말을 했다.
“아마 야근할 것 같아. 늦게 들어갈 거야. 나 기다리지 말고 일찍 쉬어.”
한은찬은 송해인에게 오늘 밤 윤시진과의 모임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송해인은 늘 한은찬의 사교 인맥에 끼고 싶어 했다. 한은찬의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 애썼고 심지어 절친들 생일까지 미리 기억해 한 달 전부터 정성스럽게 선물을 준비하기도 했다.
송해인이 준비한 것은 그녀가 직접 조제한 한방 건강 보조제였다. 몸에 좋다는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한은찬의 친구들 중 가난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이 선물하는 것은 하나같이 명품으로 값비싼 선물들뿐이었다.
송해인이 그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한방 약재를 내밀었을 때 한은찬은 그들의 눈빛에서 노골적인 조롱과 불쾌함을 선명히 보았다.
그들이 송해인을 무시하고 그녀의 선물도 깔본다는 것을 한은찬도 알고 있었다.
만약 송해인이 오늘 밤 윤시진의 생일 파티에 간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도 억지로 따라가려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면 오히려 더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반면 송해인은 지금 한은찬이 야근을 하든 말든 전혀 관심 없었다. 그녀의 관심은 오직 두 아이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럼 준서와 진희는? 내가 데리러 갈게.”
한은찬은 테이블 모서리에 놓인 두 아이의 사진을 힐끗 본 뒤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학교 끝나고 국제 피아노 대가에게 피아노 레슨을 두 시간 받기로 했어. 운전기사더러 데리러 가라고 할게. 넌 그냥 집에서 푹 쉬어.”
송해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알겠어. 너무 무리하지 마. 몸조심하고. 다리 회복되면 최대한 빨리 회사에 돌아갈게.”
송해인은 스카이 그룹 의약 연구 개발부의 책임자이자 수석 의학 책임자였다.
이제 그 커리어를 송해인은 다시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한은찬의 귀에는 송해인이 회사로 돌아가 그를 돕고 싶어 안달 난 것처럼 들렸다.
한은찬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생각했다.
‘송해인은 역시 내 손바닥 안이네, 영원히 내 주위만 맴돌아. 송해인에게 미소만 지어줘도 만족한단 말이야.’
한은찬의 목소리는 더욱 부드러워졌다.
“해인아, 내가 회사에 있는 한 넌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어.”
송해인은 속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실력과 세 개의 의약 특허로 연구 개발부의 수석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은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송해인이 스카이 그룹에 들어간 것이 그의 덕분인 것처럼 들렸다.
옷장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 송해인은 눈빛이 차갑고 냉정했다. 이제 한은찬이라는 인간에게 질려 있었지만 겉으로는 감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은찬아, 네가 최고야...”
‘최고...’
그러나 송해인이 스카이 그룹 연구 개발부의 수석으로서 받는 연봉은 고작 200원, 이건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한은찬, 한은찬이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해인아, 나는 이제 막 대표이사가 되었어. 그래서 멋진 재무제표를 만들어서 그룹에 최대의 이익을 갖다 다 줘야 해.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줘.’
송해인은 한은찬을 위해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늘리는 첫 번째 조치로 자신의 연봉 2억 원을 없앴다.
그때 한은찬은 감동받은 얼굴로 말했다.
“해인아, 내 것은 곧 네 것이야. 절대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 돈 때문에 고생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러면서 송해인에게 가족 카드 한 장을 건넸다.
기억을 더듬어 옷장 밑바닥에서 한은찬이 준 그 카드를 꺼낸 송해인은 은행에 전화를 걸어 그 카드의 상태를 물었다.
은행 직원이 바로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해당 카드는 5년 전에 한은찬 님께서 이미 정지하신 카드입니다.”
손에 들린 이미 정지된 은행 카드를 바라본 송해인은 쓸쓸하고도 비꼬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한은찬, 이게 네가 말한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뜻이야?”
한때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만큼 한은찬을 정말 믿었다.
하지만 결국 한은찬은 송해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삐비빅.
바로 그때 송해인의 개인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 시간에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낼 사람은 오직 한 명, 정채영뿐이었다.
[해인아, 네가 부탁한 임지영의 정보 확인해 봤는데 엄청난 걸 찾았어! 언제 만나서 줄까?]
오늘 밤 한은찬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했으니 송해인은 이 기회를 틈타 정채영을 만날 수 있었다.
송해인이 답장했다.
[오늘 밤 퓨처 레스토랑에서 보자. 예전의 그 자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