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파티가 절반쯤 지나자 음악이 흘러나왔고 공현우는 늘 그래왔듯 최다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최다인은 조용히 손을 얹었다.
공현우의 손바닥은 따뜻했고 잡는 힘은 안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춤추는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음악에 맞춰 천천히 움직였다. 공현우의 스텝은 능숙했고 그녀를 이끌어 부드럽게 회전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간격을 자연스레 피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내내 옆쪽의 홍시아에게 꽂혀 있었다.
홍시아의 파트너였던 안경 쓴 젊은 남자는 핸드폰을 들고 급히 밖으로 나가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음악은 끊기지 않았고 무대 위 커플들은 계속 회전했다.
홍시아는 홀로 무대 아래 서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손가락으로 치맛자락을 꼬아 쥐며 공현우를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공현우의 스텝이 점차 느려졌다.
최다인은 그가 자신의 손을 순간 꽉 쥐는 걸 느꼈다.
공현우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설명하는 듯하면서도 스스로를 설득하는 듯 말했다.
“가서... 홍시아와 한 곡 추고 올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잖아. 홍시아 혼자 있으면 불편해 보이니까.”
최다인이 답하기도 전에 그는 손을 놓고 뒤돌았다.
공현우는 홍시아 앞에 다가가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자 홍시아는 고개를 들었고 눈빛이 환해지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는 홍시아를 이끌고 다시 무대 중앙으로 들어갔다. 홍시아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고, 공현우는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받쳤다.
음악이 바뀌었고 느린 블루스가 흘러나왔다.
둘은 놀라울 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
공현우는 일부러 스텝을 더 느리게 홍시아의 호흡에 맞춰 걸었다. 홍시아가 고개를 들어 무언가 말하고 있었고 입술은 그의 귀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말을 들었고 어느새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를 최다인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비즈니스적인 가식의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편안할 때 눈가가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 웃음이었다.
한때 그녀에게도 가끔 보여주던 웃음이었다.
최다인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주위에서 꽂히는 시선들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동정, 호기심, 그리고 구경거리 취급하는 눈까지... 과거 사업 파트너였던 사람이 다가와 농담조로 말했다.
“공 대표는 참... 꽃을 보면 못 지나치네요.”
최다인은 잔을 들어 천천히 흔들며 미소를 띠었다.
“그러게요. 그래서 제가 공 대표를 선택했죠.”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김 대표님, 회사 주가가 이번 주에 얼마나 떨어졌죠? 농담할 여유가 있는 거 보니 멘탈은 강하신 것 같네요.”
상대는 순간 말문이 막혀 헛웃음만 짓고 물러났다.
그 후의 시간 동안 최다인은 이런 흔들림 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모든 시험 섞인 말에 품위 있게 대응했고 악의 어린 농담에는 단호하게 받아치며 선을 지켰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숨기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잡힐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 음악이 멈춘 사이 공현우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는 다소 숨이 가쁜 표정이었고 짧게 설명하며 그녀의 손등을 몇 번 토닥여주었다. 그러나 시선은 이미 다시 홍시아 쪽으로 향했다.
“홍시아가 좀 불안정해서... 내가 챙겨야 할 것 같아.”
최다인은 입꼬리에 맺힌 비웃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당신이 챙겨줘.”
그 한마디에 공현우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고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이 옅어졌다.
다시 음악이 흐르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홍시아를 바라봤다. 홍시아도 그를 바라보며 눈빛에는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듯한 미묘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공현우가 최다인에게 말했다.
“가서 홍시아랑 한 곡 더 추고 올게.”
최다인은 둘이 다시 춤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공현우에게 필요한 건 ‘순종적인’ 약혼녀였다. 필요할 때 곁에 있고 필요 없을 때 조용히 물러나 있는 사람.
그는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최다인과 결혼 약속한 순간 책임을 다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모든 게 정상이라고 생각했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마음 편히 홍시아를 돌봤다.
하지만 최다인은 그의 인생 멘토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성장을 책임져야 할 의무도 없었다. 더구나 공현우는 그녀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 5년 동안 쏟아부은 마음과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공정한 마무리를 자신에게 돌려주는 것. 그리고 이제 거의 다 왔다.
자산관리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후 최다인은 시선을 돌려 파티장을 조용히 떠났다.
호텔 밖으로 나오자 초겨울의 찬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차는 시동을 걸고 어둠 속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갔다.
집에 돌아온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머리를 말리기 위해 드라이어를 들려는 순간 문에서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공현우가 돌아온 것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 듯 외투를 벗는 동작도 가벼웠다. 거실에 앉아 있는 최다인을 보자 그는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왜 먼저 갔어?”
최다인은 드라이어 코드를 꽂으며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말했다.
“두통 때문에.”
“그럼 일찍 쉬어.”
공현우는 그렇게 말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덧붙였다.
“아, 우리 엄마가 너 보고 싶대. 결혼 전에 같이 밥 먹자고 하셨어.”
그제야 최다인은 고개를 들었다.
공현우의 어머니는 최다인의 기억 속에서 언제나 따뜻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5년 전 공씨 가문이 무너졌을 때 공현우의 아버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심장병으로 입원했다. 그 옆을 한 달 내내 지킨 이는 최다인이었다.
그때 그녀는 밥을 먹이고, 몸을 닦아드리고, 말을 들어드리고, 밤에는 간이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다.
윤선정은 퇴원 후 최다인을 볼 때마다 손을 꼭 잡고 고맙다고 했다. 공현우가 재기해 큰집으로 옮겼을 때도 윤선정은 낡고 오래된 집을 고집했다.
최다인은 매달 찾아가 안부를 묻고 말벗이 되어드렸으며 윤선정도 그녀를 각별히 챙겼다. 과일이며 간식이며... 최다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한가득 보내주곤 했다.
세상에서 최다인에게 진심으로 잘해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공현우의 어머니는 그중 하나였다.
잠시 침묵하던 최다인이 조용히 물었다.
“언제?”
“이번 주말 어때?”
공현우가 답했다.
최다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윤선정의 얼굴을 보긴 봐야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