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일요일 아침, 공현우가 운전대를 잡았고 최다인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에는 보양식과 건강식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차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고 윤선정, 윤선정은 1층 작은 마당이 딸린 집에 살고 있었다.
둘이 내리자 윤선정이 이미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활짝 웃으며 최다인의 손을 꼭 잡았다.
“어디 보자, 다인이 또 살 빠졌네?”
윤선정 손은 따뜻하고 건조했으나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최다인의 마음이 순간 약해졌다.
“어머님, 요즘 몸은 좀 어떠세요?”
윤선정은 나직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괜찮지. 그냥 너희 둘이 늘 걱정돼서 그래.”
셋은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은 크지 않았지만 아주 단정하고 깔끔했다.
소파에는 손뜨개 러너가 깔려 있었고 탁자 위 과일은 모두 예전에 최다인이 자주 사 오던 것들이었다.
윤선정은 그녀 손을 끌어 앉히며 이것저것 물었다. 일은 힘들지 않은지, 잠은 잘 자는지, 결혼 준비는 잘 되어 가는지... 얼마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윤선정의 화제가 슬쩍 바뀌었다.
그녀는 최다인의 손을 꽉 잡고 부드럽게 말했다.
“다인아, 결혼하면... 일은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윤선정은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현우 회사도 이제 커졌잖니. 집도 챙길 사람이 필요하고. 여자는 아무래도... 결국 가정이 제일 중요하단다. 지금 하는 일 너무 바쁘지? 야근도 많고... 나중에 애 생기면 어떻게 할 거니?”
그 눈빛 속 기대는 최다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비 며느리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모양새를 향한 기대였다.
최다인은 잠시 멈칫하다가 최대한 가볍게 말했다.
“일은 제가 잘 조절할게요. 어머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윤선정이 더 말하려는 순간, 공현우가 끼어들었다.
“엄마, 다인이도 다 생각이 있어요. 너무 간섭하지 마세요.”
“알았어, 말 안 할게.”
윤선정은 웃었지만 최다인을 바라보는 눈에는 여전히 희미한 불만이 남아 있었다.
점심 무렵, 초인종이 울렸다.
최다인이 문을 열자 문 앞에는 홍시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예쁜 포장 상자를 들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다인 씨, 아주머니 계세요? 저도 인사드리러 왔어요.”
최다인이 말하기도 전에 윤선정이 소리를 듣고 뛰어나왔다. 그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반가움이 넘쳐 있었다.
“시아 왔구나! 어서 들어와, 밖에 추워.”
홍시아는 자연스럽게 과일 바구니를 건네고 몸을 굽혀 신발을 갈아 신었다.
윤선정은 그 모습을 친딸을 보듯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인아, 소개할게. 여긴 시아야. 우리 현우랑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
“시아야, 여긴 다인이. 우리 현우의 약혼자야.”
홍시아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최다인 씨, 또 뵙네요.”
최다인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윤선정에게 말했다.
“어머님, 기억 안 나세요? 예전에 공씨 가문에 문제 생겼을 때 홍씨 가문이...”
“다인아.”
그러자 공현우가 말을 끊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명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팔을 잡아 한쪽으로 데려갔다.
“우리 엄마 앞에서는 그 얘기 하지 마. 엄마는 홍시아가 날 배신했다는 걸 몰라. 그냥 집안끼리 사업 문제였다고만 알아.”
최다인은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래서 어머님을 계속 속이겠다는 거야? 아버님 죽게 만든 사람의 딸이랑 저렇게 가깝게 지내게?”
공현우는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엄마 건강이 안 좋아. 자극 주면 안 돼. 좀 상황을 봐가면서 말하면 안 돼? 시아가 몇 년 동안 엄마 자주 찾아오고, 말동무도 돼주고... 너보다 엄마한테 더 잘했어.”
최다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한 달 동안 옷도 갈아입지 못하며 병원에서 어머니를 지키던 그녀의 마음은 홍시아의 가끔 찾아오는 방문보다도 가벼운 것이었다.
그녀가 침묵하자 그는 손을 놓고 말투를 조금 부드럽게 했다.
“오늘은 엄마 기분 좋잖아. 분위기 깨지 말자.”
최다인은 마지막으로 맞이하는 이 만남만큼은 망치지 말자 스스로 다짐하며 조용히 말했다.
“...응.”
점심은 윤선정이 직접 요리했다. 자신 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홍시아가 옆에서 든든히 도왔다.
최다인과 공현우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
주방에서는 칼질 소리와 두 사람의 웃음 섞인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공현우는 핸드폰을 보다가 가끔 고개를 들어 주방을 바라봤고 입가에는 담담한 미소가 번졌다.
반 시간이 지나자 최다인은 도와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문턱에 다다르자 어머니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렸다.
“시아야,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우리 현우가 다인이랑 결혼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건 그 애니까 책임은 져야지. 그래도 결혼해서 우리 집안일 돕는 것뿐이지 너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어.”
홍시아는 나직하게 훌쩍였다.
“그만 울고. 자, 이거 좀 썰어줄래?”
윤선정은 홍시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
최다인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더 이상 이 ‘마지막 인사’조차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거실로 돌아온 그녀는 공현우에게 급히 회사 회의가 생겼다고 말했고 윤선정한테 전해달라 한 뒤 서둘러 떠났다.
그날 이후 그녀는 그들을 보지 않으면 심란할 일 없다는 마음으로 공현우와 일부러 마주치지 않았다.
자산 이체 기록을 다시 확인하며 모든 금액이 안전하게 넘어갔음을 확인했다. 홍재 그룹의 사기 증거 역시 종류별로 정리해 예약 발송을 걸어두었다.
결혼식 전날, 미용실에서 관리를 받고 집에 돌아와 일찍 잠들었다. 단잠이었지만 의외로 잠은 아주 편안했다.
다음 날은 결혼식이었다. 새벽 다섯 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약속대로 찾아왔다.
화장이 절반쯤 끝났을 무렵 초인종이 울렸고 메이크업 보조가 문을 열었다. 최다인은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홍시아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건 최다인의 웨딩드레스와 똑같은 디자인의 드레스였다. 홍시아의 미소에는 승리감, 도발, 심지어 한 점의 연민까지 담겨 있었다.
“신기하네요. 나도 이걸 골랐거든요.”
대기실은 숨죽일 만큼 조용해졌고 최다인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 의미를 짐작하기 어려운 미소였다.
“그래요? 그럼... 오늘 재미있게 놀다가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