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공현우가 문을 밀고 들어왔을 때는 시간은 이미 일곱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예복을 갖춰 입고 머리까지 말끔하게 빗어 넘긴 상태였다.
대기실 안에서 똑같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홍시아를 보자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네가 여긴 왜 있어?”
홍시아는 천천히 돌아섰다.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그녀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다인 씨 들러리 해주러 왔지.”
공현우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장난하지 마.”
홍시아는 스스럼없이 그의 팔에 팔짱을 끼며 다가섰다.
“아주머니도 괜찮다고 하셨어. 결혼식에 다인 씨 도와줄 사람 하나 더 있으면 좋다고.”
공현우의 시선이 최다인에게 향했다.
최다인은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화장은 이미 마친 상태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공현우는 팔을 빼내고 그녀 앞에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는 오늘 하루만 들러리 할 거야. 결혼식 끝나고 홍재 그룹 쪽 지분만 넘겨받으면 그때 완전히 끊어낼게.”
그는 다급하게 설명하며 최다인의 반응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최다인은 눈을 들어 거울 속에 비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공현우의 얼굴에는 죄책감도 있었지만 더 큰 건 당연하다는 확신이었다. 그는 그녀가 또다시 참아주리라, 큰 그림을 위해 견디리라, 목표를 위해 감정 따위 눌러놓으리라 너무도 당연하게 믿고 있었다.
홍시아는 이미 메이크업을 다시 받고 화려한 다이아몬드 장신구까지 착용한 채 조명 아래에서 번쩍였다. 오히려 신부보다 더 눈부신 차림이었다.
최다인은 시선을 거두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기사 제목은 또 뻔하겠네. ‘공우 그룹 공현우 대표,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호사를 누린다’... 뭐 이런 식?”
말은 날카로웠지만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공현우는 안도하듯 숨을 쉬며 그녀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랑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평생 너 하나야.”
열한 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최다인은 레드카펫을 걸었고 그 뒤를 홍시아가 따랐다.
하객들은 수군거리며 최다인을 보다가 홍시아를 보더니 다시 서로를 보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홍시아는 그녀 뒤에서 완벽한 미소를 지었고 심지어 최다인의 머리 장식을 정돈해 주는 시늉까지 했다.
공현우는 레드카펫 끝에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최다인에게 잠깐 머물렀다가 어김없이 홍시아에게로 미끄러졌다.
최다인은 아주 안정된 자세로 걸었다. 마치 저 아래 웅성거림이 애초에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사회자의 멘트와 함께 서로의 서약을 읽고 이어 반지를 교환하는 순서가 왔다.
공현우는 반지 케이스를 받아 열었다. 반지는 밝은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최다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반지를 그녀의 약지로 가져갔다.
바로 그때, 결혼식장 측면 대형 스크린이 갑자기 켜졌다.
원래 웨딩 사진이 떠야 할 자리에는 고화질 클로즈업 한 장 떠 있었다. 흰 피부의 홍시아의 등, 거기에 빼곡히 남은 붉은 흔적들... 동시에 음성 파일이 재생되었다.
바로 그날 밤, 공현우가 ‘훈육’이라 부르던 순간의 녹음이었다. 거친 숨소리와 밀착하는 소리 속 두 사람의 대화가 선명히 들렸다.
“그럼 너는 평생 그 여자 몰래 이렇게 나 만날 생각이야?”
“나 다음 달 다인이랑 결혼해. 이 일은 영원히 모를 거야.”
공현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이 되었고 그는 장비 제어존으로 뛰어가 장비를 거칠게 꺼버렸다.
홍시아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지고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더없이 눈부시게 비치며 이 결혼식 자체를 조롱하는 듯했다.
하객석은 몇 초 정적이 이어진 뒤 폭발하듯 웅성거림이 터졌다.
최다인은 마이크를 들어 두 번 두드렸다. 그러자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귀한 시간 내주신 여러분께 이런 걸 보게 해서 죄송합니다. 방금 공개된 증거에 따라 저는 공현우 씨와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합니다.”
그 말을 남기고 반지를 집어 던진 뒤 그녀는 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결혼식장을 곧장 빠져나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정신이 든 공현우가 급히 달려와 그녀의 팔을 움켜쥐었고 그의 손아귀의 힘이 너무 세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다인아,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그건 다 지난 일이야.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을 때 한 말이고...”
최다인은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공현우, 너... 정말 네 진심이 뭔지 알고 있기는 해?”
그녀는 그의 눈을 또렷하게 마주했다.
“넌 그 여자에게 미혹된 게 아니야. 애초에 벗어난 적이 없지. 너는 홍시아 씨를 죽도록 미워하면서도 놓지 못해. 그리고 나는 네가 고통스러우면 찾는 진통제잖아. 넌 그냥 날 네 인생 최대의 암흑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구처럼 썼어.”
“내가 너 옆에서 5년이나 있었는데... 단 하루라도 나한테 진심이었던 적 있어?”
공현우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아니야...”
최다인은 그 말을 잘랐다.
“그게 맞는지 아닌지... 네가 알아서 생각해.”
그러다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할 시간은 없을 거야. 내 소중한 시간 5년이나 낭비했으니 이제 난 내 방식대로 돌려받을 거거든.”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소매를 정돈한 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공현우는 막으려 했지만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져 움직이지 못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하자 최다인은 차에 올라타 기사에게 공항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켜 누군가의 번호를 찾아냈다. 전화는 바로 연결되었고 상대는 공현우의 라이벌 주은찬이었다.
“이제 시작해도 돼요. 제 손에 있는 공우 그룹 지분 51%, 시가의 20% 할인해서 전부 넘길게요.”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합니까?”
최다인은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약서는 이미 작성했고 제 변호사가 바로 연락드릴 겁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고 공항으로 들어섰다.
최다인은 오래전부터 사적인 감정에 판단과 이성을 잡아먹히지 않는 법을 배워온 것에 새삼 다행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가치 없는 일이나 사람에게 시간을 버리지 않는다. 상대가 공현우라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