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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추석 휴가가 끝난 첫날, 모두의 일이 한결 가벼워졌고 많은 사람이 아직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다만 회사에는 여전히 소처럼 말처럼 일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서나빈. 서나빈은 심지원에게 회사 앞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았다. 어쨌든 대표의 차인데 누가 보면 해명하기가 곤란했다. 그녀는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내렸고 몰래 약국에 들러 피임약을 샀다. 윤시헌이 어떤 조치를 했는지는 몰랐지만 만일을 위해 먹었다. 그때 서나빈의 전화벨이 울렸다. 상대는 서나빈의 현재 남자친구 지형우였다. “흥.” 그 역겨운 이름을 보자, 그녀의 입꼬리가 비꼬이듯 올라갔다. 지형우와 서나빈은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연애 5년째였다. 그녀는 공부를 잘해 몇 학년을 건너뛰었고 3살 많은 지형우를 그러다 알게 됐다. 2년 전 서나빈은 엄마를 따라 해외로 가서 지내며 유학했고, 둘은 줄곧 장거리 연애를 했다. 하지만 지형우는 외로움을 못 이겨 국내에 있는 그녀의 친구와 얽혀버렸다. 서나빈은 당장 판을 깨지 않았다. 둘과 감정 소모할 생각도 없었고, 차라리 후궁 싸움 벌이듯이 조만간 크게 한 방 먹일 작정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끊었다. 화면을 끄려던 찰나 카톡에 새로운 친구 추가 알림이 떴다. [윤시헌] 서나빈은 그 자리에 굳어 서서 몇 초를 뚫어져라 봤다. 처음에는 자신이 착각한 줄 알았다. ‘이건 어떤 신분으로 친구 추가한 거지? 대표? 아니면 섹파?’ 그녀는 이를 악물고 거절했다. 서나빈은 의상 디자이너로 LS 패션에 온 지 1년, 디자인부의 부장 말고는 다른 임원들과 거의 말 섞을 일이 없었다. LS 패션은 A시 최대의 의류 회사로 매출은 해외까지 뻗는다. 평소 윤시헌 같은 거물은 얼굴 보기조차 힘들었다. 어젯밤은 단순히 사고였다. 이번 추석 패션쇼가 역대 기록을 깼고, 그래서 그가 온 것이었다. [디자인부 공지: 10분 후 회의실 회의 예정] “헐!” 서나빈은 허겁지겁 회사 쪽으로 달렸다. ... LS 빌딩 안. 엘리베이터에서 서나빈은 절친을 마주쳤다. “나빈아, 너 정장 제일 싫어하잖아, 오늘은 웬일로 정장 치마를 입었어?” 같은 디자이너인 연이정이 위아래로 훑어봤다. 맞다, 서나빈은 정장 세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옷깃을 잡아당겼다. “나의 전문성을 부각하려면 이렇게라도 보여주는 수밖에.” “쯧쯧...” 연이정은 그녀를 힐끗 보더니 엉덩이를 탁하고 쳤다. “어느 남자가 너를 데려가든 복 터졌네.” “야...” ‘아프다고...’ 서나빈은 이를 꾹 다물고 말이 없었다. 막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문틈 사이로 누군가 손을 쑥 넣어 문을 멈췄다. 심지원이 몸을 비켜 세웠고, 그 뒤로 온통 검은 슈트를 입은 윤시헌이 걸어 들어왔다. 서나빈과 연이정은 알아서 옆으로 비켰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바로 옆에 윤시헌이 서 있었고, 연이정은 정면에 섰다. 서나빈은 윤시헌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공간이 너무 좁아서인지, 그의 압박감이 덮쳐서인지, 숨이 턱 막혔다. 붉은 기가 귓불에서 뺨까지 훅 치올랐다. 둘의 거리는 가까웠고, 또 굳이 더 벌리기도 민망했다. 그에게서 은은한 향이 났다. 어젯밤과 같았다. ‘참 좋았지...’ 서나빈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말이다. 엘리베이터가 겨우 디자인부 28층에 멈췄고, 둘은 화살처럼 튀어나오듯 달려 나갔다. “심장 떨어질 뻔!” 연이정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낮게 말했다. “어젯밤 회식 끝나고, 나 대표님 차에 여자가 탄 거 봤어. 세상에! 그 여자가 목을 감고 계속 키스하더라니까! 대표님 거절도 안 하더라고! 우리 대표님 드디어 속세에 눈을 뜬 건가?” “...” 서나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예전 같으면 이런 가십을 엄청 좋아했겠지만 지금은 부메랑이 되어 자기에게 꽂히니 한마디도 못 했다. “그래?” “그래서 지원 씨한테 톡 보냈는데 입이 진짜 무겁더라. 한마디도 안 했어.” 연이정은 사원증을 걸고 노트북을 정리했다. 10분 뒤, 모두가 회의실에 모였다. 휴가 간 이가 많아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회의는 이번 행사에 대한 총정리였다. 먼저 디자인부의 남신으로 통하는 부장 남서진이 발언했다. 그는 이번 행사에 대해 아주 자신만만했고 스스로도 높이 평가했다. 모두가 말하기를 올해 보너스는 분명히 그가 가장 많이 받을 거라고 했다. 왜인지 모르게, 서나빈은 그가 딴생각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약이라더니 사실은 사람들한테 아부나 받으려는 자리 같았다. 마지막에 그의 시선이 서나빈에게로 옮겨왔다. “가장 감사해야 할 분은 우리 나빈 씨죠. 올해 가장 많이 쓰인 디자인이 나빈 씨의 것이고, 가장 잘 팔린 작품도 나빈 씨의 작품입니다.” 서나빈은 입술만 다물고 웃었다. 어젯밤에 이미 귀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들었으니, 더는 같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남서진의 능력은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개방적이고 약간 방종한 성격 덕분에 일은 척척 풀리고, 그래서 많은 이가 그와 잘 지냈다. 하지만 서나빈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늘 은근슬쩍 그녀를 좋아한다는 티를 냈고, 그녀도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회의는 오래가지 않아 끝났다. 그때 마침 심지원이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나빈 씨, 대표님이 대표이사실로 잠깐 오래요.” “...” 순식간에 장내가 적막해졌다. 의자에서 졸던 서나빈은 수십 쌍의 눈이 자신에게 꽂히는 것을 느꼈다. 대표이사실은 꼭대기 30층에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가본 적 없었다. 평소 회의는 29층에서 하고, 30층은 일종의 미지의 공간이었다. 일명 지옥이라는 말이다. 지난번에는 어떤 부장이 팔이 아예 빠진 채 대표이사실에서 나왔다. 게다가 윤시헌의 전임 비서는 왼쪽 다리가 부러져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심지원이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비서님, 무슨 일인지 아나요?” 남서진이 제 사람을 감싸듯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심지원에게로 쏠렸다. 그가 웬만해서 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눈빛에서 뭔가를 읽어내고 싶어 했다. “모르겠어요.” 심지원의 입은 바위처럼 굳게 닫혀 있었다. 꿈쩍도 안 했다. “다녀올게요.” 서나빈의 홍조는 오전 내내 가시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어젯밤 늑대 같은 그의 모습뿐이었다. “나빈 씨, 상태가 좀 안 좋아 보이네요. 아침부터 얼굴이 빨개요. 하루 쉬는 게 어때요?” 남서진은 직원들에게 늘 이렇게 살가웠기에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니요, 금방 다녀올게요. 제가 못 돌아오면 사무실에 남긴 아이디어는 부서의 유산으로 돌려줘요.” 서나빈은 한숨을 쉬고 회의 기록을 챙겨 나왔다. 그녀는 심지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30층 엘리베이터는 안면 인식이나 카드가 필요해서 보통은 올라가기 어렵다. 심지원이 얼굴을 인식시키자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상승했다. “여기는 아무도 없으니까, 대표님이 왜 저를 부르셨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서나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말씀은 없었어요. 다만 기분은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하... 기분이야 당연히 좋겠지. 어젯밤 재미를 몇 번이나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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