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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났다. “들어와요.” 서나빈은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윤시헌은 컴퓨터 앞에서 일하고 있었다. 아침과 달리 재킷은 벗었고 검은 셔츠는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으며 넥타이는 한쪽으로 젖혀져 있었다. 어젯밤 그녀가 윤시헌의 목에 남긴 흔적이 어슴푸레 보였다. 그는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나른하면서도 점잖은 척하는 기색을 지어 보였다. 서나빈이 천천히 들어가자 뒤에서 심지원이 습관처럼 문을 닫아 주었다. 탁. 문 닫히는 소리는 작았지만 서나빈의 귀에는 천둥처럼 울렸다. “대표님, 저를 부르셨어요?” “응.” 윤시헌이 문가에 선 그녀를 힐끗 보고 다시 시선을 화면으로 돌렸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겨우 1분이었지만 하루처럼 길었다. 윤시헌이 일어나 서나빈 쪽으로 걸어왔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많은 소녀가 꿈꾸는 남자친구의 정석 같은 사람이었다. 또렷한 윤곽, 단정한 얼굴, 높은 콧대, 붉고 얇은 입술, 길게 오른 눈꼬리. 서나빈도 자꾸만 보게 되었다. 윤시헌이 서면 서나빈의 정수리는 그의 턱선에 닿을까 말까 했다. 몸매도 좋았다. 어젯밤 욕실에서 그녀의 손이 가장 많이 더듬은 곳이 그의 단단히 갈라진 복근이었다는 사실도 기억이 났다. ‘미친, 또 어젯밤이 떠올랐어...’ “무슨 일이신가요?” 겉으로는 파도 한 점 없게 또렷이 말했지만 속은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앉아.” 윤시헌이 방향을 틀어 소파 쪽에 앉았다. 서나빈은 걸어가 그와 두 걸음 남짓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여기로.” 그는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서나빈은 두어 초 망설이다가 옆으로 옮겨 앉았다. 윤시헌의 시선이 그녀를 붙잡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서나빈은 긴장해 두 손가락을 꼭 맞물렸다. “아직도 아파?” “...” 서나빈이 멍해지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다시 그 얘기를 꺼내서 뭐 해?’ “생각은 어때?” 서나빈이 슬쩍 그를 보았다. 고른 쇄골, 그리고 목에 어렴풋이 남은 키스 마크... “죄송해요, 대표님. 제가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감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미안하다고 하지 마.” 윤시헌은 상체를 곧게 세우며 말을 끊었다. 소파에 기대앉아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어젯밤은 내가 먼저였어.” 그는 천천히 말했다. “너는 많이 취해 있었고, 키스는 먼저 했지. 그다음은 내가 제멋대로였고.” “그만 말해요...” 이미 충분히 창피한데 면전에서 한 번 더 굴욕을 겪으라는 말인가. “저희는 성인이잖아요. 한 일은 한 거고, 이제 없던 일로 하면 돼요.” 서나빈의 볼은 연지라도 찍은 듯 활활 달아올랐다. “나를 몸 파는 사람으로 알아?” 윤시헌의 차가운 낯빛은 마치 서나빈을 문초라도 하겠다는 듯했다. “오해하셨어요.” 서나빈의 귓불까지 새빨개졌다. ‘뭘 하려는 거지? 부적절한 관계라도 시작하자는 건가? 아침의 그 신사 같은 태도로 봐서는 또 그런 사람도 아닌데!’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 “네?” 서나빈은 제 귀를 의심했다. 둘의 시선이 맞물려 잠시 얽혔다. 그의 눈 속 생각은 읽히지 않았다. “어젯밤 피임 안 했어. 애 생기면 낳자. 아니어도 내가 책임질게.” 그는 담담했다. 마치 남 얘기를 전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이다. 서나빈은 침묵했다. 지금만큼 정신이 또렷했던 적이 없었다. 윤시헌은 문화적 내력이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가정교육은 흠잡을 데 없었고, 아마 보수적인 남자일 것이다. 아니었으면 스물여덟에 아직 미혼일 리가 없다. 한 번 일이 벌어지자, 아마 그의 내면은 도덕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 것이다. 서나빈은 감히 넘보지 않았다. 자신의 내력을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엄마와 어떤 사업가 사이에서 난 사생아였다. 아빠가 누군지는 모른다. 어릴 적부터 온갖 소문을 견뎌 왔다. 그런 자신이 윤시헌 같이 깨끗한 사람과 얽히면 발목을 잡는 일밖에 더 되겠는가. 게다가 지형우가 남긴 상처 탓에 당장 새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었다. “죄송해요, 대표님. 저 다른 뜻은 없어요. 피임약은 오늘 아침에 이미 먹었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는 결혼 같은 걸 바라지 않아요. 어젯밤 일로 대표님이 저한테 미안하게 느끼신다면, 당사자인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으니 이걸로 끝내요. 앞으로 이 얘기는 꺼내지 말아 주세요.” 윤시헌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테 없는 안경 아래 깊고 검은 눈동자가 바닥을 알 수 없이 가라앉았다. 서나빈은 한숨에 말을 끝내고 돌아서서 대표이사실을 나가려 했다. “잠깐.” 윤시헌이 천천히 일어났다. 방금 서나빈의 말에 그의 마음이 순간 멈칫했다. 그는 A시에서 이름난 재벌. 곁을 파고드는 여자는 셀 수 없이 봐 왔지만, 이토록 단호하게 거절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서나빈은 길게 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대표님,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친구 추가해.” 그는 담담하게 말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 “다음 달 S국 패션위크, 회사에서 너랑 남 부장을 보낼 생각이야. 가고 싶으면 방금 그 말은 없던 걸로 해.” “그리고...” 그가 덧붙였다. “아까 그 질문은 급하지 않아. 시간 줄 테니 천천히 생각해.” ‘역시 장사꾼이야!’ 두세 마디로 그녀를 본인이 원하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S국 패션위크는 아무나 갈 수 없었다. 놓치기 아까운 기회였다. 서나빈으로서는 손해 볼 일도 아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밀어 그의 연락처를 추가했다. 뒤에 이어진 질문은... ‘일단 접어두자.’ ... 자리로 돌아오자 가십쟁이 연이정이 달려왔다. “어때? 대표이사실 진짜로 호화로워?” 사실 서나빈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내내 윤시헌의 칼같은 질문에 끌려다녔으니 말이다. “말로는 설명 못 해. 다음에 내가 신청해 줄게. 네가 직접 견학해 봐.” 서나빈은 입술을 오므리고 장난스럽게 윙크했다.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너 들것에 실려 나올 줄 알았거든.” 연이정은 모니터 속 숫자를 맞추다가도 그녀를 흘끗 봤다. “나빈 씨!” 남서진이 쪼르르 달려왔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과하게 들뜬 표정이 부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끌었다. “네, 부장님.” 서나빈은 급히 일어섰다. 어젯밤 윤시헌이 내려다보며 턱을 쥐고 좋아하냐고 물어오던 순간 이후, 위에서 찍어 누르는 느낌이 벌써 공포가 되어 있었다. “윗선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어요. S국 패션위크 배정 인원, 나빈 씨랑 나, 둘 다 들어갔네요!” “알고 있어요.” 서나빈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회사에는 연차 높은 이가 수두룩했다. 입사 1년 차인 자신이 이런 자리를 받으면 이후 화살받이가 될 것이 뻔했다. 아마 윤시헌이 어젯밤 일을 만회하려고 이 자리를 줬을 것이다. 소식이 퍼지자 부서가 들끓었다. 누구는 기쁘고 누구는 좌절했다. 막 들어온 젊은 직원들은 더 의욕이 붙었다. 하지만 연차 높은 이들은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오래 일했어도 A시 패션위크조차 나가 보지 못한 사람이 많으니, 하물며 해외 무대는 오죽하겠는가. 서나빈은 개의치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했다. [나빈아, 오늘 밤 시간 돼? 영화 보자.] 지형우의 메시지였다. 서나빈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사람의 뻔뻔함이란... 애인 따로 달래고, 본처한테 아부를 하는 꼴이었다. [좋아!] 서나빈은 화면을 캡처해 게시물에 올리려 했다. 공개 범위는 절친 유민정에게만. 문구는 ‘5년 내내 한결같음’으로 했다. 곧 가만있지 못하는 유민정이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나빈아, 오늘 우리도 친구들이랑 영화 보러 가. 너희는 무슨 영화 봐? 몇 시 거야?] ‘흥. 이렇게 성실한데 라벨 하나도 안 달아 주면 억울하겠네.’ 서나빈은 답장하지 않고 그냥 화면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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