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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오후 퇴근 시간, 회사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갔다. 서나빈은 창가에 서서 아래에서 꽃을 들고 기다리는 지형우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지형우는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당연히 아버지가 사람을 써서 이름만 올려 둔 자리였다. 명함값만 있을 뿐 실권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A시 최대 자동차 딜러사의 사장으로, 서나빈과 아들의 관계를 몹시 반대했고, 오히려 유민정의 집안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래서 유민정은 반드시 손에 넣을 상대였고, 지형우는 아직 서나빈과 연애 중이라는 이유로 이렇게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다. 서나빈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이어폰을 꽂은 채 지형우의 전화를 받았다. 한 손으로 태블릿의 만화를 보면서 얼굴에 싫증을 잔뜩 띄운 채 일부러 새초롬한 목소리로 아양을 떨었다. “알았어, 자기야. 먼저 가 있어. 나 금방 도착해. 제시간에 갈 거니까 걱정하지 마.” 서나빈은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열려 있었고, 심지원이 손으로 문을 붙잡아 닫히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가짜로 애교 섞인 서나빈의 표정을 보자 엘리베이터 안의 윤시헌은 눈썹 끝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심지원은 웃지 못하고 고개만 돌렸다. “맞아, 너도 알잖아. 우리 대표 그냥 뱀파이어야...” 더 말하려던 찰나 무심코 고개를 들다가 윤시헌의 어두운 얼굴과, 끝장났다는 표정의 심지원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서나빈은 놀라 전화를 끊었다. “대, 대표님...” “응.” 어쩐지 윤시헌의 입가에서 아주 옅은 미소가 스친 듯했다. “들어와.” 심지원도 잽싸게 눈짓했다. 서나빈은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옆에 섰다. 어색함이 셋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말 한마디가 부르는 화가 생각보다 너무 컸다. “약속 있나 봐?” “아니에요. 친구 하나 장례식장에 배웅하러 가요.” 서나빈이 불쑥 내뱉었다. “도와줄까?” 그는 이 답이 그리 놀랍지 않은 듯했다. “일단은 괜찮아요.” 그녀는 애써 웃었다. 심지원은 그 말의 속뜻을 알아챘다. 왜냐하면 지형우와 서나빈의 일은 이 셋 사이에서는 비밀이 아니었으니까. 딩. 18층, 홍보부 층에서 한 번에 일곱, 여덟 명이 몰려 들어왔다. 심지원과 서나빈은 얼른 뒤로 물렀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고 아무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윤시헌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홍보부 사람들은 확실히 텐션이 높았다. 늘 왁자지껄하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수다를 멈추지 않는다. “여기 자리 없어요, 좀 비켜요.” 누가 한마디 하자 엘리베이터가 꽉 차기 시작했다. 그때 허리께가 문득 조여들었다. 얇은 셔츠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스며들더니, 그녀의 몸이 윤시헌 쪽으로 이끌렸다. 파운데이션 바른 볼이 그의 검은 슈트에 살짝 스치며 옅은 하얀 자국을 남겼다. 곧 그의 손은 스르르 떨어졌다. 순간 그녀의 얼굴은 마치 100도짜리 화로처럼 달아올랐다. 1층에 도착하자 홍보부 사람들은 벌떼처럼 쏟아져 나갔다. 그들 사이의 수군거림이 귀에 스쳤다. “봤지? 대표님 목에 키스 마크!” “오늘 아침 대표님이 누군가랑 아침 먹었다던데, 누군지는 몰라도 목에 사랑의 증표를 보니 여자기는 여자지!” ... 역시 홍보부다웠다. 그 순간, 서나빈도 따라 나가려 했지만 출구에 서 있는 지형우가 눈에 들어오자 급히 몸을 옆으로 숨겼다. 윤시헌은 그녀를 힐끗 보았지만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안 나가요?” 심지원이 웃으며 물었다. 서나빈은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걸 확신했다. 나가면 쓰레기 남자친구와 마주쳐야 했다. 그렇다고 안 나가면 이들과 같이 올라가야 하나? 게다가 오늘은 윤시헌의 차를 타고 왔다. 그렇다고 그 차를 타고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위에 두고 온 게 있어서요. 먼저 내려가세요. 저는 좀 있다가 갈게요.” 서나빈은 대충 핑계를 댔다. 한 층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조차 길게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가 목에 칼을 대고 언제든 벼락처럼 내려칠 것만 같았다. 지하 1층, 그들은 드디어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게 생겼다. 차라리 자리로 돌아가 원고나 그리는 편이 나았다. ... 28층. 서나빈은 숨을 돌렸다. 창턱으로 돌아와 창밖에 촘촘히 켜진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자리에 앉아 음악을 틀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지형우에게서 전화가 다시 왔다. 그녀는 받지 않고 바로 전원을 껐다. 그리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한 잔 타와 다시 펜을 들었다. ‘두고 봐, 바람둥이야. 내가 가만둘 줄 알아?’ 열 시 반. 서나빈은 입술을 축였다. 스케치를 보니 꽤 마음에 들었다. 노트북을 덮고 기지개를 켠 뒤 가방을 메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응?” 두 대의 엘리베이터 표시등이 모두 꺼져 있었다. 휴대폰을 켜 보니 단체방에 공지가 와 있었다. ‘엘리베이터 정비... 내일 아침 여덟 시부터 운행 재개?! 그럼 28층을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고?!’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엘리베이터를 찍었다. [이 몸이 회사에 갇혔노라. 어디 호위하러 올 자 없는가...] 사진과 함께 게시물을 올렸다. 그러고는 맥없이 음산한 비상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서나빈은 한숨을 내쉬고 용기를 끌어모아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두 층도 채 못 내려가서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누가 건 전화인지도 보지 못한 채 휴대폰을 중앙 계단 틈으로 떨어뜨렸다. 계단실에 벨소리가 메아리쳤다가 곧 멎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고 그녀의 거친 숨만 남았다. 서나빈은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명은 까맣게 죽어 있었다. 아마 떨어지며 고장 난 듯했다. ‘미친.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잖아.’ 전원 버튼을 누르며 이 돌발 상황을 수습해 보려 했다. 다시 켜지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화면은 끝내 켜지지 않았다. 대신 위층의 감지등이 번쩍 켜졌다. 곧 또각또각 내려오는 소리가 났다. 딱, 딱, 딱... 구두 소리, 그리고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그녀는 벽 모퉁이로 살짝 몸을 붙였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큰 실루엣 하나가 계단참 위에 섰다. 그는 빛을 등지고 섰다. 완벽한 윤곽이 그림자에 잠겼고, 희미한 감지등만이 그를 비추었다.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다. “나야. 뱀파이어 대표.” 목소리만 들어도 윤시헌이었다. “대표님, 왜 여기 계세요?” 놀라 얼이 빠진 서나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뱀파이어는 원래 밤에 활동하지.” 말끝에 살짝 장난기 어린 웃음이 섞여 있었다. “....” 은근히 앙갚음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서나빈은 마음이 내려앉았다. 적어도 수상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니, 잠깐. 이 사람도 별로 선한 사람은 아니지.’ “올라와.” 윤시헌이 말했다. “저 집에 가야 해요.” 지금 눈앞의 남자가 어떤 상황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윤시헌이 알아차리기 어려운 코웃음을 아주 작게 쉬었다. “1층 잠가 놨어. 못 나가.”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엘리베이터 정비는 보통 한두 시간. 개의치 않으면 올라와서 커피라도 마실래?” 엄청 신경 쓰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안 된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윤시헌은 서나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위로 걸어갔다. 서나빈은 아래로 뚫린 새까만 심연을 한 번 내려다보고, 그를 따라 위로 올라가기로 했다. 30층, 비상계단 문에도 출입 통제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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