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대표이사실에 두 번째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은 크고 널찍했다. 커다란 책상 하나, 소파 한 세트, 소파 안쪽에는 차를 마시는 공간까지 있었다.
“피곤하면 안쪽에서 좀 자.”
윤시헌은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턱을 까딱했다.
서나빈은 그의 시선을 따라 책상 옆 작은 방을 힐끗 봤다. 거긴 꽤 집 같았다. 그날 밤 그곳과는 달리...
‘하... 나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는 바깥 소파에 앉아 있을게요.”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섰다.
“네 마음대로 해.”
윤시헌은 책상 앞으로 돌아가 앉아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서나빈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기다리기를 택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젯밤 내내 못 잔 그녀는 소파에 누운 채 스르르 잠들었다.
책상에 앉은 윤시헌은 쉬지 않고 서류를 넘기고 일을 처리했다. 바닥나지 않는 체력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분명히 어젯밤 두 사람은 똑같은 일을 했고, 어쩌면 그는 더 고생했을 텐데 체력 차이가 너무 컸다.
서나빈이 깼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였다.
윤시헌은 통유리창 앞에 서서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훈련된 듯한 체형은 숨기기 어려웠다. 넓은 어깨, 잘록한 허리,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소매 사이로 팔의 도드라진 핏줄이 어렴풋이 보였다.
서나빈은 뻐근한 목을 짚으며 아파서 살짝 끙 소리를 냈다. 일어나자 그의 검은 재킷이 그녀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안 주무세요?”
그가 일을 마치면 안쪽 방에서 잘 줄 알았다.
“엘리베이터 고쳐졌어.”
“아...”
“바래다줄게.”
윤시헌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괜찮아요, 아래 내려가서 택시 잡을게요.”
서나빈이 가방을 들었다.
윤시헌은 외투를 집어 들고 곧장 뒤를 이었다.
서나빈은 조금 불편했다. 들러붙는 강아지처럼 떼어내기 힘든 느낌이었다.
밖으로 걸어 나가 지하 주차장 입구도 채 못 나갔을 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다. 그녀가 비켜섰지만 검은 차는 계속 경적을 울렸다.
그녀가 소리 나는 쪽을 돌아봤다.
“타.”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그윽했다. 테 없는 안경 아래 어두운 눈빛이 서늘했다.
서나빈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잠깐 망설이다가 차에 올랐다.
바로 그때 번호가 290인 BMW 한 대가 급히 핸들을 꺾어 지하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끽.
타이어 미끄러지는 소리가 주차장에 길게 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 차를 따라가다가, 차가 사라지자 비로소 시선을 거두었다.
정신을 차린 서나빈은 서둘러 치맛자락을 끌어당겼다. 앉자마자 치마가 뒤로 말려 올라가 거의 허벅지 근처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 옷 대체 누구더러 사 오라고 한 거야? 입기가 왜 이렇게 불편해.’
그녀가 몸을 살짝 고쳐 앉는 순간...
딱.
가슴 앞 단추 하나가 튀어 나갔다. 이어서 어젯밤 그가 남긴 흔적이 훤히 드러났다.
“...”
윤시헌은 흘끔 보더니 곧 시선을 거두었다. 마른침이 저도 모르게 꿀꺽 넘어갔다.
서나빈은 허겁지겁 가슴팍을 가렸다. 얼굴은 감처럼 붉게 달아올랐는데 몸을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1킬로만 더 빠지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남들처럼 가슴이라도 작던가...’
윤시헌은 뒷좌석에 있던 검은 재킷을 그녀에게 휙 던졌다. 서나빈은 눈치껏 재킷을 걸쳐 여미었다.
가는 길에 그는 차를 세우고 길모퉁이 가게에서 바닐라 디저트를 하나 샀다. 은은한 향에 그녀는 한 번에 알아챘다. 그건 서나빈이 가장 좋아하는 맛이었다.
집에 있는 어떤 여자에게 주려나 했는데, 내릴 때 그가 그대로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서 먹어.”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다.
“고마워요.”
서나빈이 받았다.
바닐라 향을 메인으로 하는 이 디저트에는 여자의 몸에 좋은 약재도 들어갔다. 그녀는 쇼핑할 때마다 하나씩 사 먹었고, 이 가게는 새벽 세 시까지도 줄을 설 정도로 유명했다.
‘그걸 대표님이 어떻게 알았지?’
서나빈이 빌린 집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플로라 단지에 있었다. 밤은 이미 깊었고, 윤시헌은 그녀의 건물 아래에 차를 세워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봤다.
윤시헌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지 채 1분도 안 돼 16층에 불이 켜졌다. 그제야 그는 시동을 걸고 회사로 돌아갔다.
...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닥에 노란 튤립 한 다발과 이미 식어 버린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꼴이 마치 장례 치르러 온 것 같네... 재수 없게.’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있어야 하는 법이다.
서나빈은 미간을 찌푸리고 커피를 들어 옆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튤립을 돌아보더니 작은 손을 꽉 쥐고 검은 하이힐을 올려 쓰레기통 옆으로 한 번에 걷어찼다.
지문으로 문을 열고 그리웠던 작은 집으로 들어섰다. 맞지 않는 큰 외투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욕실로 들어갔다.
서나빈은 한참을 씻고서야 욕실 밖으로 나왔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 서나빈은 휴대폰 전원을 다시 켰다.
다행히 휴대폰은 멀쩡했다. 전원이 켜지자 띵띵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수십 개의 메시지가 폭탄처럼 쏟아졌다.
서나빈은 읽지도 않고 전부 읽음 처리만 하고 닫았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눈에 꽂히는 문자가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없고, 걱정돼서 그래. 오늘 꽃은 막 따온 거야.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오래 사귀었지만, 그는 여전히 로맨틱했다. 다만 그 로맨스는 지나치게 만연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빠져들기 쉬웠다.
여자를 위해 무료 봉사까지 하는 대가다웠다.
서나빈은 비록 한 부모 가정에서 자랐지만, 엄마는 삶의 기준이 단단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영향 속에서 그녀는 절제된 삶을 살았고, 지형우와도 결혼 얘기가 오갈 정도였어도 손잡는 것 이상의 선은 넘지 않았다.
추석 패션 전시 당일 철수할 때였다. 평소 쇼핑도 잘 하지 않는 지형우가 눈에 들어왔다.
유민정과의 관계는 진작 알았지만, 막상 그가 유민정과 길거리에서 서로 매달리며 애정행각을 벌이는 걸 직접 보니 천 개 만 개의 바늘을 삼킨 듯 목구멍이 아팠다.
그 장면을 윤시헌과 심지원도 마침 보았다. 서나빈의 낯빛이 심상치 않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일에 관해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래서 뒤풀이 때 그녀가 과음을 했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서나빈은 모르게 윤시헌의 카톡을 눌러 열어 보았다.
그 계정을 한참 바라보다가 옆에 놓인 재킷과 그 디저트를 힐끗 봤다. 그리고 그날 그가 했던 그 황당한 말을 떠올렸다.
‘나랑 결혼하지 않을래?’
서나빈은 잠시 넋이 나갔다.
‘아무리 남자가 고파도 이렇게 찾을 수는 없어!’
윤시헌은 회사의 대표였다. 어떻게 자신 같은 말단 직원을 좋아하겠나?
‘그래, 봉사하러 온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 정확히 나를 집어냈겠어. 말도 안 되지.’
전에 올린 게시물을 보니 난리가 났다. 다들 서나빈이 열정이 넘쳐서 회사에서 야근했다고들 떠들었다.
그때 익숙한 프로필 사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윤시헌, 그가 그녀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눌렀다.
‘혹시 이걸 보고 아래로 내려와 나를 찾았던 걸까? 아닐 거야... 설마...’
그녀는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옆에 던진 뒤 디저트를 열었다. 그리고 한 입 살짝 먹었다.
‘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