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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서나빈은 하룻밤을 끙끙거리며 고민하다가 결국 윤시헌을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어쨌든 회사의 사업이 걸린 일이고 문지아와 정면으로 틀어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회사에서 문지아의 체면은 남겨 주는 편이 나았다. 회사로 돌아오니 여전히 동료들의 수군거림이 귓가를 스쳤다. 서나빈은 잡음에 둔감한 편이라 이런 유언비어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심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심지원이 받았다. “대표님 오늘 시간 되시는지 좀 물어봐 줘요. 면담 예약하고 싶어요.” “그냥 바로 올라와요.” 딱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대답은 심지원이 생각조차 거치지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서나빈이 엘리베이터를 타자 위에서 심지원이 버튼을 눌러 주었고, 그녀는 무사히 30층에 올랐다. 서나빈은 곧장 대표이사실로 가지 않고 옆에 선 심지원을 다그쳤다. “방금 통화할 때 대표님도 옆에 계셨죠?” “와, 나빈 씨 머리는 뭐로 만든 거예요? 어쩜 그렇게 똑똑해요!” 서나빈은 한숨을 쉬었다. 보고도 올리지 않고 바로 부른 건 단 하나의 가능성뿐이었다. 두 사람의 통화가 윤시헌의 귀에 들어갔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그와 자고 난 뒤, 그가 일방적으로 마음을 정해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인연의 실이 억지로 손목에 걸린 기분이랄까. 서나빈은 조심스레 대표이사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오늘도 온통 검은 슈트. 옷이 한 벌뿐인 사람처럼 갈아입는 일이 없는 것만 같았다. “무슨 일이야?” 윤시헌은 손에 쥔 펜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서나빈을 바라보았다. 서나빈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했다. 다 듣고도 윤시헌은 곧장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말했다. “이건 내가 처리할게.” “사과가 필요해요. 면전에서요. 물론 회사에 영향은 없게요.” 서나빈은 대세를 아는 편이지만 가끔은 한 곳만 파고드는 구석도 있었다. “응.” 윤시헌이 낮게 대답하며 의자에 몸을 기대고 무게를 실은 어조로 말했다.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회사에는 영향 없어. 그래서 공개하지 않겠다는 거지?” “WR 그룹 운송부랑 LS 패션이 협력 중이잖아요. 크든 작든 영향이 있을 거예요.” 서나빈은 일을 키우느니 줄이는 쪽을 택하고 싶었다. “나를 걱정해?” “...” 분명히 공적인 이야기인데도 그 한마디에 볼이 다시 달아올랐다. “아니에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지아 씨도 여자예요. 이런 일을 한 데에는 사정이 있겠죠. 굳이 곤란하게 만들지는 말아요.” “네 말대로 할게.” 그 한마디는 다정한 연인에게 건네는 말처럼 들렸다. 서나빈은 진심으로 자신을 꼬집고 싶었다. 애초에 여기 올라오지 말아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지원이 문지아를 데리고 들어왔다. 서나빈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나빈을 본 문지아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시헌 오빠, 나를 찾았어요?” “나를 뭐라고 불렀지?” 그동안 고개도 들지 않던 윤시헌이 갑자기 깊은 눈을 들어 그녀를 흘겨보았다. 문지아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면 어느 정도는 체면을 세워 줄 줄 알았지만, 찬물을 뒤집어쓴 셈이었다. 그녀는 급히 호칭을 바꿨다. “죄송해요, 대표님.” 윤시헌은 어금니를 한 번 물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부른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불렀어.” 문지아의 시선이 서나빈에게로 옮겨 갔다. 서나빈은 미소를 띠고 손짓했다. “안녕하세요, 지아 씨.” 이 와중에도 가식 미소를 이렇게 자연스럽게 올릴 수 있는 자기 멘탈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나빈 씨, 무슨 일이에요? 디자인부 일은 개인적으로 해결하면 되잖아요. 꼭 시헌 오빠 귀찮게 해야 해요?” 문지아의 어조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아직도 서나빈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쪽에 베팅하는 눈치였다. ‘시헌 오빠’라는 말이 가슴에 걸렸는지, 윤시헌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서나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댁 시헌 오빠를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디자인부 직원들까지 건드리면 지아 씨가 감당 못 할까 봐서요.” 그녀는 휴대폰에서 영상을 열어 보여 주었다. 문지아의 얼굴이 순간 새하얘졌다. 무릎이 떨렸고 작은 손은 꽉 쥐어졌다. “흠, 시헌 오빠라...” 윤시헌은 아주 작게 한숨을 쉬며 얇은 입술 사이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이 다툼에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나빈 씨...” 문지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고작 하루 만에 영상을 찾아냈다고?’ “이런 일을 하면 디자이너로서 명성은 어쩌려고요? 시헌 오빠가 말리지 않았으면 벌써 디자인부에서 밝혔을 거예요.” 서나빈은 담담하게 문지아를 바라보았다. 의자에 앉은 윤시헌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소파에서 침착한 서나빈에게 시선을 두었다. “문지아, 사과하고 나가.” “시헌 오빠!” 문지아는 아이처럼 떼를 썼다. “대표님이라고 불러.” “나빈 씨는 시헌 오빠라고 부르는데, 왜 나는 안 돼요?” “너도 안 돼.” 윤시헌은 서나빈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나빈은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문지아는 억울했지만 윤시헌의 말이 떨어졌으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나빈 씨. 제가 나빈 씨를 모함했어요.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알았어요.” 서나빈은 속이 시원해져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윤시헌은 손을 내저어 나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두 여자의 목소리에 머리가 윙윙 울려서 시끄러웠다. 문지아가 씩씩거리며 나가려는 순간... “잠깐.” 그가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들었다. “그날 밤 돌아갈 때, 다른 사람 마주친 적 없지?” 서나빈의 작은 손이 꽉 쥐어졌다. ‘역시 그냥 지나갈 수는 없었나 보네.’ 태도만 보면 윤시헌은 서나빈보다도 그들의 관계가 밝혀지는 걸 더 신경 쓰는 눈치였다. 문지아는 차갑게 서나빈을 흘끗 보더니 말했다. “없어요.” 그는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문 닫고 나가. 서나빈, 너는 남아.” 문지아는 뒤돌아보며 한 번 더 싸늘한 눈길을 주고 나갔다. 서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이리 와.” 서나빈은 얌전히 그의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윤시헌은 특유의 위압으로 의자에 기댄 채 두 손을 팔걸이에 느슨히 얹었다. “내가 너는 안 혼낼 줄 알았어? 응?” “대표님,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녀는 능청을 떨었다. 윤시헌 같은 사람이 자신의 속내를 모를 리 없었지만 그래도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때 그가 했던 청혼이 진심인지, 아니면 둘이 잔 뒤의 양심 때문인지. “이제 와서 대표님이래. 아까는 시헌 오빠를 줄줄이 불러 대더니?” 그녀의 표정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윤시헌은 화를 내고 싶다가도 도무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서나빈의 시선이 슬며시 그의 셔츠 깃에 멎었다. 어제 자신이 찢어 버린 옷이 문득 떠올랐다. 그는 서나빈의 눈길을 따라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또 무슨 의미야?” 서나빈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흥미를 느낀 듯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대고 나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내 몸이 탐나?” “아, 아니에요... 대표님, 다른 일 없으시면 저는 먼저 나갈게요.” 윤시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서나빈은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 그는 입가를 살짝 올렸다. ‘재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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