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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세계 1위 부자 성도현은 소문난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5년 동안 강나연과 결혼 생활을 해오며 일을 핑계로 수십 번씩 그녀를 바람맞혔다. 첫 번째는 강나연의 생일이었다. 그녀가 정성껏 레스토랑까지 예약했지만 성도현은 인수 합병 건 때문에 급히 해외로 날아가 버렸다. 강나연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기다려 봤지만 결국, 성도현은 와 주지 않았다. 두 번째는 강나연이 교통사고를 당했던 때였다.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필요하다던 의사의 말에 그녀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성도현에게 문자를 보냈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중요한 일 얘기 중이니 알아서 처리하라는 답변뿐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강나연의 아버지가 위독하던 때였다.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이 바로 성도현을 한 번 만나는 것이었지만 그는 수천억 규모의 프로젝트 계약식을 핑계로 강나연의 전화를 무시해 버렸다. 그녀는 점점 차게 식어가는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던 발신음을 들으며 절망 속으로 빠져야 했다.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된 끝에야 강나연은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성도현의 마음속에 비즈니스보다 중요한 존재는 없었다. 강나연은 끝없이 자기 세뇌를 거듭했다. 이 모든 게 다 정략결혼의 대가였다. 성도현은 처음부터 강나연을 사랑할 생각은 없다고 분명해 말해두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아직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강나연이 이런 차가운 절망에 거의 익숙해지려던 무렵, 사교계에는 충격적인 소문이 퍼졌다. 여자를 멀리하고 오직 일에만 몰두하던 그 성도현이 남몰래 자신만의 피앙세를 두고 애지중지하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성도현은 그 소녀와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기 위해 계약을 앞두고 있던 수천억 원의 프로젝트까지 내팽개쳤다고 한다. 게다가 워커홀릭으로만 살아가던 그가 일주일 동안 잡혀 있던 모든 회의를 취소하고 아픈 고양이 때문에 속상해하던 그 소녀를 위로해 주러 한달음에 달려갔다고 했다. 성도현은 그 소녀가 가치를 측정하기조차 힘든 계약서에 함부로 낙서하는 것도 허락했고, 심지어는 그녀가 아무렇게나 내뱉은 재미없다는 한마디에 회장급 파트너와의 회담도 중단했다고 한다. 처음 이 소문을 들었을 때는 강나연도 믿지 못했다. ‘말도 안 돼! 그게 대체 누군데? 시간이 금보다 더 귀해서 꺼져가는 사람 목숨까지 외면했던 성도현이 그런 짓을 한다고?’ 강나연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모든 인맥과 재산을 동원해 몰래 그 소녀가 누군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도현이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었던 탓에 강나연은 막대한 노력과 돈을 쏟아붓고도 흐릿한 옆모습 사진 한 장만 겨우 얻을 수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소녀는 흐릿한 옆모습에서도 사랑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성도현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애지중지하는 모습은 강나연이 그와 결혼한 5년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 사진을 손에 넣은 날 오후, 강나연은 불안한 마음에 집을 나섰다. 막 길가에 들어섰을 때, 검은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통제력을 잃은 듯 맹렬히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강나연은 차 안에 있는 운전자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땅에 세게 떨어졌다. 이윽고 극심한 고통이 온몸을 휩쓸면서 점차 의식이 흐려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의 지독한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도현의 비서실장이 사무적인 태도로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정신이 드시나 보네요, 사모님.” 비서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표님께서 사모님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는데요. 조사해서는 안 될 사람과 일에 대해서는 함부로 조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다음에는 단순한 사고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에 강나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에 당장이라도 질식할 것만 같았다. ‘성도현이라고?’ ‘설마 이 사고가 진짜 성도현이 꾸민 거란 얘기야?’ 단지 강나연이 소녀의 옆모습이 찍힌 사진 한 장을 찾아냈다는 이유만으로 성도현은 교통사고까지 꾸며내며 서슴없이 강나연에게 손을 댔다. 엄청난 충격과 심장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그녀가 그토록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가, 오직 일에만 열중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 남자가 이제는 강나연이 아닌 다른 여자를 위해 이토록 광적이고 잔인한 짓을 저질렀다.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강나연은 어쩌면 영원히 그 소녀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주일 후, 예상치 못한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경찰서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성도현 씨 가족분이신가요? 누가 성도현 씨를 지금 성매매로 신고를 하셔서... 번거로우시겠지만, 잠시 와주셔야겠습니다...” 그 순간, 강나연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성매매라고? 성도현이?’ 강나연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집을 나섰다. 경찰서로 들어서자마자 세련된 드레스를 입은 앳된 얼굴의 한 소녀가 다리를 꼬고 벤치에 앉은 채 새침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아직도 그 사람한테 연락 안 했어요? 내가 성매매로 고소한다고 했잖아요. 못 알아들었어요? 아니면 세계 1위 부자라서 체포할 용기가 없는 건가?” 주위의 경찰들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해명했다. “이봐요, 아가씨.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성도현 씨는...” “무슨 오해요!” 소녀는 불만스럽게 발을 굴렀다. “여기서 체포 못 한다고 하면 다른 경찰서 가서 신고할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찰서 밖에서는 차량의 급제동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몸에 딱 맞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성도현이 냉정한 얼굴로 걸어 들어왔다. 그 잘생긴 얼굴과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경찰서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가장 먼저 강나연을 발견한 그는 곧바로 미간을 구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목이 멘 강나연은 바싹 말라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경찰분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성도현의 안색이 더 어두워지더니 이윽고 감히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야. 먼저 돌아가.” 말을 마친 성도현은 더 이상 강나연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소란을 피우고 있던 소녀에게 걸어갔다. 그다음으로 보이는 장면에 강나연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피가 차게 식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항상 고고하고 얼음장 같아 보이기만 했던 성도현이 소녀의 앞에 몸을 낮춰 무릎을 꿇더니 그녀를 올려다보며 강나연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던 부드럽고도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자기야, 왜 또 이렇게 심통이 났어? 응?” 윤서아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입술을 삐죽 내밀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성도현 씨 때문에요! 3초 안에 답장하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아무 답장도 안 해줘요? 나도 너무 짜증 나서 성매매로 신고해 버리려고 온 거예요!” 터무니없는 이유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성도현은 이 말에 조금도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나지막이 웃어 보였다. 그는 윤서아의 뺨을 쓰다듬으며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래, 다 내 잘못이지. 성매매로 신고하겠다고 했으니까, 내가 며칠 동안만 감옥에 갇혀 있으면 네 화가 조금이라도 풀릴까? 응?” 성도현은 정말로 옆에 서 있던 경찰에게 양손을 내밀며 수갑을 채우라는 듯한 시늉을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경찰의 얼굴은 새하얘져만 갔다. 비서가 서둘러 앞으로 나서서 해명했다. “윤서아 씨, 다 오해예요! 대표님께서 오전에 사고를 당하시는 바람에 팔에 부상을 입었거든요. 그거 치료하느라 병원에 계셨던 거고, 휴대폰도 배터리가 없어 꺼져버리는 바람에 답장을 제때 못 하신 거예요. 제발 화 풀어주세요!” 그 말에 당황한 윤서아가 급히 성도현의 손을 잡았다. 비서의 말대로 그의 정장 소매 밑에서는 흰 거즈가 보였다. 윤서아는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따졌다. “다쳤어요?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성도현은 그저 다정한 손길로 윤서아의 뺨을 닦아주며 말했다. “어쨌든 너한테 바로 답장하겠다고 약속한 건 나야. 지키지 못한 것도 내 잘못이고. 약속을 어겼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윤서아는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성도현의 품에 안겼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성도현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꿀이라도 떨어질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야 당연히 널 사랑하니까. 내가 먼저 잘못했잖아. 우리 자기는 날 어떻게 벌하고 싶은데?” 윤서아는 빠르게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미소를 짓더니 눈을 몇 번 굴리다가 입술을 내밀며 손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그럼 여기서 말타기할래요!” 비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는 상사의 체면을 생각해 윤서아를 말려보려 했지만 성도현은 곧장 손을 들어 비서를 제지했다. 그는 윤서아를 바라보며 애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꼭 여기서 해야겠어?” “네, 꼭 여기서요!” “좋아.” 성도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몸을 낮춰 바닥에 꿇어앉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자, 올라타.” 윤서아는 즐겁게 웃으며 익숙하게 성도현의 등에 올라탔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한껏 들떠 있는 어린 공주 같았다. 그리고 전 세계 금융 뉴스에 모습을 보이며 독단적으로만 굴어대던 비즈니스의 제왕은 기꺼이 그 어린 공주를 등에 태우고 경찰서 바닥을 기어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성도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불쾌함도 보아낼 수 없었다. 그의 표정에 담긴 감정은 오직 한없는 포용과 애정뿐이었다. 경찰서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고 사람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오직 강나연만이 입을 꼭 틀어막은 채 고장 나버린 수도꼭지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죽어도 소문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일에 미쳐 냉정하고 매정하게만 굴어오던 냉혈한 성도현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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