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그동안의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질식할 것 같은 쓰라림을 동반했다.
강나연은 그와 결혼하기 전부터 성도현의 명성에 대해 익히 들은 바 있었다.
언론은 그의 잘생김과 업무 능력, 그리고 수완을 찬양하느라 온갖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댔다. 사회적으로 성도현은 가장 완벽한 후계자였고 사람들의 기대했던 대로 회사를 물려받은 지 고작 1년 만에 성운 그룹을 포브스 정상에 올려놓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아마 여자를 너무 멀리 둔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직 일만을 위해 태어난 기계처럼 굴며 그 누구와도 인연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회장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성도현의 차갑고 매혹적인 분위기와 탁월한 자태에 강나연은 순식간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그렇게 그녀의 마음속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들어설 여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문에서 정략결혼을 제안했을 때도 기쁜 마음으로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승낙했었다.
하지만 친구만은 강나연을 만류했다.
“성도현이 좋은 건 맞지만 워커홀릭이잖아. 감정도 없어서 뭔 기계 같아. 결혼한다고 해도 너 행복하게 못 살 것 같은데.”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강나연은 끝없이 노력하면서 충분한 사랑을 퍼붓는다면 언젠가는 성도현의 얼어붙은 마음도 사르르 녹일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그 믿음의 결과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신혼 첫날밤, 형식적인 부부의 의무만 끝마친 성도현은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남녀 사이의 애정 따위에는 아무 관심 없어. 너랑 결혼하는 것도 그냥 사업적으로 필요해서야. 너만 분수를 알고 산다면 나도 부부의 의무를 충분히 이행할 의향이 있어. 너도 평생 성운 그룹 안주인으로서의 명예를 누리고 살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이상은 더 바라지 마.”
결혼 후, 성도현이 몇 번이나 일을 핑계로 자신을 무시하고 내팽개쳤을 때도 강나연은 꾹 참았다.
강나연은 성도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쉽긴 하지만 다른 여자에게도 마음이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며 끊임없이 자기합리화했다.
하지만 오늘 성도현이 윤서아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어떤 식으로 머리를 숙이는지, 그리고 강나연은 5년 동안 원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애정 어린 말을 직접 목격하고 나니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자신이 없었다.
성도현은 태생적으로 여자를 멀리하거나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여자였을 뿐이었다.
모든 고집과 인내는 어느 순간 우스운 농담이 되어 버렸다.
강나연은 눈물을 닦으며 힘없는 발걸음으로 경찰서를 걸어 나왔다. 이윽고 휴대폰을 꺼내 든 그녀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장 변호사님, 이혼 합의서 작성 좀 부탁드립니다.”
다음 날, 강나연은 갓 나온 따끈따끈한 이혼 합의서를 들고 성운 그룹 본사로 향했다.
하지만 안내 데스크 직원은 아쉬운 목소리로 안내했다.
“사모님, 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는 회사에 출근을 안 하신 지 꽤 오래되셨습니다.”
강나연의 심장은 다시 한번 바늘에 찔린 듯 따끔해 났다.
‘회사에 출근 안 한 지 꽤 오래됐다고?’
‘프로젝트 하나 때문에 한 달 내내 회사에서 먹고 자던 워커홀릭 성도현이?’
강나연은 쓰라린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알아요?”
안내 데스크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윤서아 씨라 같이 소더비 경매장에 계실 거예요.”
‘경매장이라...’
강나연은 그동안 떠돌던 소문들을 떠올려 보았다. 듣기로 성도현은 윤서아의 미소를 하나를 보기 위해 돈을 물 쓰듯 쓴다고 했다.
심호흡을 크게 한 강나연은 곧장 차를 몰고 경매장으로 향했다.
경매장 안은 화려한 옷을 입은 유명 인사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들어서자마자 가장 앞줄에 앉아 있는 성도현과 그의 옆에서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윤서아를 발견했다.
진행자는 마지막 하이라이트 경매품인 블루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 목걸이는 솔레이유 여왕의 것으로 알려진 물건으로서 시작 가격부터 이미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입찰 경쟁이 매우 치열했지만 누군가 가격을 제시할 때마다 성도현은 주저 없이 패들을 들어 가격을 불렀다. 나른하고 무심해 보이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반드시 그 목걸이를 손에 넣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결국, 성도현은 모두가 경악할 만한 가격으로 윤서아에게 그 목걸이를 낙찰시켜 주었다.
현장이 일순간 소란스러워지더니 모든 부러움과 질투 어린 시선이 윤서아에게 집중되었다.
윤서아는 기뻐하며 성도현의 목을 껴안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이 장면을 바라보던 강나연의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이 빠르게 뛰었다.
결혼한 지도 벌써 몇 년이 되었지만 성도현은 단 한 번도 강나연에게 변변한 선물조차 해준 적이 없었다.
그래도 강나연은 그저 성도현이 낭만을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제 와서 보니 성도현은 강나연에게 낭만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았다.
강나연은 이혼 합의서를 꽉 움켜쥔 채,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눈부실 정도로 거슬리는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성도현이었다. 나른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던 윤서아를 뒤로 보내며 강나연에게서 보호하려 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어?”
이 무의식적인 보호도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강나연의 심장을 힘껏 찔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여기 서류에 사인 좀 해줘요.”
바로 그때, 직원 한 명이 성도현에게 와서 목걸이 인수를 위한 백스테이지 절차를 밟아달라고 요청했다.
성도현은 차가운 목소리로 강나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지금은 바빠. 무슨 일 있으면 나중에 얘기해.”
‘나중이라고?’
강나연은 더 이상 나중을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단 한 순간도 기다릴 수 없었다.
“아주 중요한 서류예요. 몇 분이면 되거든요.”
강나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고집 있게 말했다.
"성도현 씨, 우리 이혼해요. 도현 씨가 여기에 사인만 하면 끝나는 거예요. 이혼 숙려 기간은 한 달이고, 그 한 달만 지나면 우리 인연은 끝나요. 이제 도현 씨한테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까 내가 놓아줄게요. 도현 씨도 이제는 나 좀 자유롭게 해 줘요. 이제 우리 각자 사랑을 찾아보자고요. 서로 방해하지 말고.”
강나연은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용기를 내 성도현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미간을 구기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돌리며 마치 강나연이 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내가 바쁘다고 했잖아. 나중에 얘기해.”
말을 마친 성도현은 직원과 함께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강나연은 다시 한번 심호흡했다. 성도현은 영원히 변함없었다. 결혼 5년 내내 그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무시해 왔다.
그녀가 급히 성도현의 뒤를 쫓으려던 그때, 윤서아가 몸을 일으켜 강나연의 손에 있던 서류를 낚아챘다.
“그쪽이 도현 씨 그 정략결혼 상대예요?”
윤서아는 경멸 섞인 시선으로 강나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슨 서류든 다 나한테 사인해달라고 해요! 도현 씨가 나한테 인감도장도 줬거든요. 그 어떤 서류든 다 내가 대신 사인해도 된다고.”
보이지 않는 손이 강나연의 심장을 힘껏 쥐어짰다. 밀려오는 괴로움에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인감도장을 줬어? 어떤 서류든 다 마음대로 사인하라고 했다니...’
성도현이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지 강나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서류를 반드시 직접 검토하고 친필 서명을 남기는 깐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윤서아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해 보이려는 듯 작은 핸드백 안에서 정교하게 조각된 인감도장을 꺼내더니 서류 내용을 보지도 않고 마지막 페이지를 펼쳐 도장을 찍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