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자, 사인 다 했어요.”
윤서아는 서류를 강나연의 손에 다시 밀어 넣었다. 그녀의 말투에는 시혜적인 감정과 경고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도현 씨한테 들었어요. 그냥 비즈니스 때문에 결혼한 거라면서요? 그럼 분수를 좀 알고 살아야죠. 이런 자잘한 계약서는 앞으로 나한테 직접 가져와서 사인하라고 하면 돼요. 별일 없으면 다시는 도현 씨한테 찾아오지 말고요. 도현 씨도 그쪽 안 보고 싶어 해요.”
강나연은 서류 위에 찍힌 선명한 붉은 도장을 바라보았다. 성도현의 권위를 상징하는 그 문양을 바라보던 그녀는 형언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느꼈다.
강나연은 이 계약서가 단순한 부동산 계약서 같은 게 아니라 이혼 합의서라고 말하고 싶었다.
바로 그때, 경매장 안에 귀를 찢는 듯한 화재 경보가 울려 퍼졌다.
“불이야! 도망쳐!”
누군가 힘껏 외치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출구로 몰려들었다.
안쪽에 서 있었던 데다가 비교적 몸집이 작았던 강나연과 윤서아는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 부딪혀 바닥에 넘어지고 말았다.
“악!”
“밟지 마세요!”
수많은 발들이 그녀들의 위를 밟고 지나갔다. 몸에서는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고 강나연은 금방이라도 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도현 씨, 성도현! 살려줘!”
윤서아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자기야!”
멀리서 성도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나연은 필사적으로 인파를 헤치며 다시 돌아오는 성도현의 모습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비참하게도 한 줄기의 희망을 피워냈다.
하지만 급히 달려온 성도현은 정확하게 윤서아만 챙기며 망설임 없이 허리를 굽혀 그녀를 번쩍 안아 들더니 밖으로 달려 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도현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강나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성도현 씨! 성도현!”
강나연은 마지막 힘을 다해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사람들의 시끄러운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 속에 묻혀 버렸다.
‘들었을까?’
성도현은 강나연의 구조 요청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밖으로 달려 나갔다.
강나연이 산 채로 사람들에게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하지만 이내 멀리에서부터 익숙한 실루엣의 누군가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어두워져만 가던 마음속에서는 갑자기 한 줄기 빛이 타올랐다. 어쩌면 성도현이 다시 자기를 구하러 와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석하게도 강나연의 곁으로 돌아온 성도현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옆에 떨어져 있던 팔찌만 재빨리 주워 들고는 그것을 손에 꼭 쥔 채 몸을 돌려 다시 자리를 떠나려 했다.
“아, 다행이다! 다시 주워 왔네요!”
멀리서 윤서아가 울음을 그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팔찌란 말이에요! 밟혀서 부서졌으면 하루 종일 울었을지도 몰라요!”
성도현은 재빨리 윤서아의 곁으로 돌아가더니 안도감과 여전한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자기 안 울리려고 이렇게 주워 왔잖아?”
“아이고, 착하다!”
윤서아는 기뻐하며 성도현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단지 윤서아의 팔찌를 주워 주기 위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성도현은 5년간 결혼 생활을 해왔던 아내보다 윤서아의 팔찌를 더 소중하게 여겼다.
엄청난 절망과 심장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거대한 돌덩이처럼 강나연을 완전히 짓눌렀다.
그녀의 눈앞이 점점 캄캄해지더니 의식이 흐릿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나연은 차가운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강렬한 수술대 불빛이 눈을 찔렀고 의사는 수술 도구를 준비하고 있었다.
“사모님, 깨어나셨네요? 몸 곳곳에 연조직 좌상을 입으셨어요. 갈비뼈에서는 골절 징후가 보이고요. 하지만 제일 심각한 것은 복부예요. 반복적인 충격 때문에 내부 출혈이 있을 가능성이 크니까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마취과 의사가 마취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쾅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수술실 문이 힘껏 열렸다.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뛰어 들어오더니 아무 말 없이 강나연의 팔에 꽂혀 있던 주삿바늘을 뽑아내고는 거친 손길로 그녀를 수술대에서 끌어내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이 환자 당장 수술해야 합니다!”
깜짝 놀란 의사가 분노 어린 목소리로 그들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경호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힘없이 피를 흘리는 강나연을 강제로 끌고 나갔다.
“놔... 줘요...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강나연은 힘없이 저항했다. 강제로 끌려가는 과정에 상처가 벌어지면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강나연은 곧장 VIP 병실 구역으로 끌려가 차가운 바닥에 거칠게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