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청력을 되찾은 뒤, 온지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심주원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청력을 잃고 지냈던 지난 3년 동안, 심주원은 한결같이 그녀의 곁을 지켜왔다. 그녀가 아무것도 들을 수 없던 시간 내내 그는 늘 그녀의 손을 잡고 입 모양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곤 했다.
“사랑해. 네가 평생 듣지 못하더라도 난 항상 네 곁에 있을 거야.”
그 기억만 떠올려도 온지아의 가슴은 따뜻한 감정으로 가득 차올랐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숨이 찰 정도로 전속력으로 달려 그가 있다는 룸으로 향했다.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쉰 뒤,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막 문을 열려는 순간, 안쪽에서 가볍게 웃는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원아, 너희 형제는 그 귀머거리한테 아직도 안 질렸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지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바로 그때였다.
“딸깍.”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얼어붙은 채 서 있던 그녀의 시야에 룸 한가운데 앉아 있던 남자가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큰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인 뒤, 잘생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또렷한 입 모양으로 천천히 말했다.
“왜 왔어?”
온지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갑자기 보고 싶어서.”
“말 들어야지.”
심주원은 다정하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익숙한 그의 품에 안기는 순간, 온지아의 가슴은 다시 한번 따뜻한 감정으로 벅차올랐다.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녀는 애써 그저 착각일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이제 막 청력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말하려던 찰나, 그녀의 머리 위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3년이나 지났으니... 나도 이제 슬슬 온지아가 질리긴 하지.”
“근데 주혁이는 아직 안 질렸대. 조금만 더 버텨 달라네.”
그 순간, 온지아는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한 감각에 휩싸였다. 머릿속이 쿵쿵 울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어댔다.
그녀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들어 심주원을 바라보았다. 눈동자에는 충격과 혼란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온지아는 알고 있었다.
심주원에게는 심주혁이라는 쌍둥이 남동생이 있으며 그는 줄곧 해외 유학 중이라고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말은 무슨 뜻이지? 주혁이가...안 질렸다니?’
그녀의 시선을 느낀 심주원은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추고는 언제나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입 모양으로 물었다.
“왜 그래?”
심장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지만 온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여기... 술 냄새가 좀 불편해서.”
“조금만 참아.”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정리해 주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시선을 돌리며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소파 쪽으로 함께 걸어갔다. 그때, 룸 안에 있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원아, 그 귀머거리 방금 말 들은 거 아냐? 반응이 좀 이상한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지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가 있겠어.”
그녀를 안고 있던 심주원은 비웃듯 웃음을 흘렸다.
“3년 내내 내가 그녀한테 청력 억제 약을 먹였거든. 치료제라고 속이고 준 약이지.”
그는 온지아를 안은 채 소파에 앉았다.
“어찌나 말을 잘 듣던지 하루도 빠짐없이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더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온지아는 심장이 벼랑 끝에서 떨어지듯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일주일 전, 강도를 만나 약이 들어 있던 지갑을 도둑맞았었다.
괜히 걱정시킬까 봐 그 사실을 심주원에게 말하지 못했고 그래서 며칠째 약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청력이 돌아오자 그녀는 그동안의 치료가 드디어 효과를 본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와, 너희 형제 진짜 대단하다!”
룸 안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은 낮에는 다정한 남자친구인 척하고 동생은 밤에 몸 가지고 놀고...”
“3년이나 됐는데 이 멍청한 귀머거리는 아무것도 몰랐다니!”
심주원은 웃으며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듯 쓰다듬었다.
“우리 형제는 얼굴은 똑같은데 목소리만 다르거든.”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래서 계속 못 듣게 만든 거구나!”
그는 과일 접시에서 바나나 하나를 우아하게 집어 들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야.”
“온지아랑 걔 친구 도민정이라는 애가 하늘이를 학교 폭력 가해자로 몰아세웠거든. 증거까지 모아서 감옥에 보내려고 했지. 결국 하늘이는 해외로 나가 몇 년을 숨어 지내야 했어. 온지아를 못 듣게 만든 건... 그 벌이기도 해.”
그 말에 룸 안의 누군가가 물었다.
“강하늘, 사흘 뒤에 귀국한다던데? 이제 그 귀머거리랑 헤어지고 하늘이랑 잘해 보려고?”
“너희 결혼식, 우리 전부 기대하고 있어...”
심주원은 여전히 다정한 얼굴로 바나나를 온지아의 손에 쥐여 주며 말했다.
“아직은 아니야.”
“주혁이가 질릴 때까지, 그리고 하늘이도 충분히 분풀이할 때까지...”
“그때까진 좀 더 이대로 둬도 괜찮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