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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온지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조용히 고개를 숙인 채, 심주원이 건네준 바나나를 받아 들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씹어 삼켰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요란한 굉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하늘...’ 그 이름은 온지아와 그녀의 절친 도민정에게 있어 악몽 그 자체였다. 당시 온지아가 곡을 쓰고 도민정이 가사를 붙여 함께 완성한 노래 한 곡을 인터넷에 올렸고, 그 곡은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전 국민이 열광하는 히트곡이 되었다. 그러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강하늘이 사람들을 이끌고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두 사람에게 곡의 권리를 넘기고 자신이 이 노래의 유일한 제작자임을 인정하라며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온지아와 도민정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강하늘은 곧바로 태도를 바꿔 인터넷에 악성 글을 쏟아내며 해당 곡이 자신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라는 거짓 주장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더는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온지아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직접 나섰지만 그녀가 올린 글들은 하나같이 삭제되었고 계정은 연이어 정지되었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강하늘이 주도한 집요한 괴롭힘과 노골적인 폭력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민정은 두 다리를 심하게 다쳐 평생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온지아 역시 폭행의 후유증으로 청력을 잃어 다시는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됐다. 도민정의 가족들은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을 온지아에게 돌리면서 결국 도민정을 데리고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홀로 남겨진 온지아는 끝까지 진실을 밝히겠다는 집념 하나로 자료를 하나하나 모아 마침내 강하늘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고소장을 완성했다. 그러나 문서를 마무리한 바로 다음 날, 강하늘이 이미 해외로 도피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순간 모든 노력은 허무로 돌아갔고 그 사건은 온지아의 삶에 가장 짙은 어둠으로 남게 되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잠에서 깨어나던 시간들. 세상을 원망하고 스스로조차 믿지 못한 채 흔들리던 그 시기에 심주원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마치 희망처럼 다가왔고 온지아는 그가 자신을 구원해 줄 사람이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강하늘의 이름을 그렇게도 다정하게 입에 올리는 순간, 온지아는 분명히 깨달았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거짓이었다. “그리고 말이야.” 심주원은 테이블 위의 와인 잔을 들어 한 모금 삼켰다. “이제 그녀 이름은 강하늘이 아니야. 조예원이라고 불러. 나중에 실수하지 말고.” 곧바로 옆에서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맞아. 이름 틀리면 안 되지! 성형하고 개명까지 했잖아. 지금은 국민 스타 조예원이라니까!” 그 말에 온지아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2년 전, 조예원이 데뷔한 이후부터 그녀의 포스터와 앨범은 온지아의 일상을 점령하고 있었다. 심지어 심주원의 서재 한편에는 조예원과 관련된 굿즈만 모아 둔 전용 책장까지 있을 정도였다. 온지아가 가끔 왜 그렇게 많이 모아 두냐고 물으면 심주원은 늘 태연한 얼굴로 이렇게 답하곤 했다. “내 동생 주혁이 친구야. 그냥 노래가 좋아서 듣는 거지.” 온지아는 그 말을 믿었고 심지어 길을 걷다 조예원이 모델로 나온 제품을 보면 일부러 사 와 그 책장에 올려두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뜨거운 인기를 누리는 싱어송라이터 조예원이 바로 자신이 3년 동안 찾아 헤매던 원수 강하늘이라니. “아, 주원아.” 누군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예원 신곡은 언제 나와? 우리 동생이 기다리다 미치겠대.” 심주원이 대답하려는 순간, 다른 남자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그건 이 귀머거리가 새 곡을 언제 완성하느냐에 달렸지!” “그러네.” 사람들은 비웃음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이 여자, 들리지 않게 된 뒤로 곡 완성도가 훨씬 좋아지지 않았어? 고통이 예술을 만든다더니 진짜네.” “맞아.” 온지아가 말없이 바나나를 다 먹자 심주원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조예원 곡을 계속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거, 그게 지금 얘가 가진 가장 큰 쓸모야.” 따뜻한 손길이 머리 위에 닿았지만 온지아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갔다. 지난 3년 동안 고통 속에서 쥐어짜듯 만들어 낸 곡들이 결국 강하늘에게 영광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산산이 부서뜨렸다. ‘심주원,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 한 시간 뒤, 술자리는 끝났다. 온지아는 마치 고장 난 인형처럼 심주원에게 손을 이끌린 채 룸을 나섰다. “몸이 안 좋아?” 3년 동안 함께 살아온 저택에 돌아오자 심주원은 그녀의 턱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술을 천천히 움직이며 입 모양을 보라는 듯 물었다. 온지아는 정신을 다잡고 감정을 억눌러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응. 머리가 좀 아프네.” “그럼 먼저 쉬어.” 그는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 주며 말했다. “난 회사에 잠깐 다녀올게.” 온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온지아는 길게 숨을 내쉬고 곧장 서재로 향했다. 서재 한가운데 놓인 책장에는 조예원이 데뷔한 이후 발표한 모든 앨범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전부 한정판 LP였다. 온지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LP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곧 방 안에 강하늘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3년 동안 악몽 속에서 수도 없이 들어야 했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자신이 작곡한 선율을 타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사는 그녀의 상처를 정확히 파고들며 숨을 조여 왔다. 온지아는 듣고 또 듣다 점점 숨이 막혀 와 끝내 참지 못하고 LP를 거칠게 잡아당겨 바닥에 내리쳤다. 산산조각 난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눈물은 말라붙었다가 다시 차올라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때 문이 열렸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들어와 첫눈에 바닥에 흩어진 LP 조각을 발견했다. 그는 잠시 멈춰 섰다가 눈빛에 스친 분노를 순간적으로 숨겼다. 온지아의 시선을 느낀 듯 그는 곧 표정을 정리한 채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예지야, 왜 그래?” 모습과 옷차림은 심주원과 똑같았지만 목소리는 훨씬 가볍고 맑았다. 온지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남자는 심주원이 아니었다. 그의 동생, 심주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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