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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결혼 3년 차, 신채이는 무려 108번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침대 곁에는 중년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그들은 신채이가 눈을 뜨자마자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할 생각이야?” “처음부터 한섭이가 좋아했던 사람은 소은이었어. 그가 술에 취해 방을 착각하지 않았다면, 너랑 결혼할 일도 없었어.” 여자는 지친 기색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 사람은 너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 집에 안 들어오는 것도 당연하지. 그런데 너는 어때? 매번 자살하겠다고 협박하고... 수없이 반복했는데도 그 사람이 단 한 번이라도 널 보러 왔니?” “네가 우리 친딸이 아니었으면 우리도 진작 손 놨을 거야.” 남자도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정말이지, 너는 소은이만도 못해.” 신채이는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모든 기억을 잃은 탓에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했고 그저 부모라 주장하는 두 사람의 매정한 꾸짖음 속에서 조각조각 찢긴 인생을 겨우 맞춰나갈 뿐이었다. 신채이는 신씨 가문의 장녀였다. 어릴 적 납치로 실종되고 어렵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신소은’이라는 입양아가 가족의 사랑을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받아야 할 사랑과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완벽히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그녀는 한경 그룹의 대표인 박한섭을 사랑하게 됐다. 하지만 그 남자의 마음에도 들어앉은 사람은 신소은이었다. 그러다 어느 연회 날 밤, 박한섭은 술에 취해 방을 잘못 들어왔고 그녀와 관계를 맺었다. 그 황당한 하룻밤의 끝에 박한섭은 책임을 지듯 신채이와 결혼했지만 그 이후 남은 건 차가운 외면과 혐오뿐이었다. 부모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고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고통 속에 살았던 신채이는 어떤 방식으로도 그 현실을 바꿀 수 없었기에 결국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관심을 얻으려 했다. “됐고, 소은이 밥 해줘야 해서 우린 이만 가볼게.” 아버지 신정훈과 어머니 김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는 여기서 반성 잘하고 있어.” 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신채이의 가슴속에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기억은 없으나 온 세상에게 버림받은 듯한 절망감만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어떻게 친딸보다 양딸을 더 사랑할 수 있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박한섭이라는 남자, 분명 방을 잘못 들어온 건 그였고 사람을 잘못 알아본 것도 그였다. 그런데도 결혼을 감행했으면서 왜 그녀를 외면하는 것일까? 왜 냉담한 말과 행동으로 끝없이 몰아붙이는 걸까? 신채이는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낯선 과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딘 칼에 베이는 듯 아팠기 때문이다. ‘이전의 나는 과연 어땠을까? 부모도, 남편도 사랑해주지 않는 그 삶을 매일같이 마주하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신채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혼자서 퇴원 수속을 마치고 병원을 나섰지만 정문 앞에 서자 어디로 가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부모의 집이 어디인지, 박한섭의 집이 어디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더 비참한 건 그 어느 집도 그녀를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병원 입구 쪽이 잠시 소란스러워졌다. 신채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키가 크고 말쑥한 남자가 연약한 여인을 안고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몸에 꼭 맞는 블랙 수트를 입고 있었고 어깨선은 곧으며 외모는 놀라울 만큼 잘생겼었는데 걸을 때마다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품에 안긴 여인은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었고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녀가 흔들리지 않도록, 걸음마저 조심스럽게 내딛는 모습에는 보호 본능과 집착스러운 기색이 엿보였다. “비켜요.” 그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는데도 주변 사람들은 저절로 길을 내줬다. “세상에, 박한섭 아니야?” 뒤편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그 사람 말고 누가 저런 분위기를 풍겨? 너무 잘생겨서 다리의 힘이 풀릴 지경이야...” 신채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저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라는 사람이구나... 그럼 저 품 안에 안고 있는 여자는 아마 내 동생이겠지?’ 남자가 신채이의 옆을 지나칠 때, 아주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살짝 스쳐보았는데 검은 잉크처럼 짙은 눈빛이 마치 얼음 칼날이 살갗을 베어내는 듯 차가웠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짧았다. 곧 그는 시선을 거두고 품 안의 여인을 안은 채 빠르게 응급실로 향했다. 신채이의 마른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와 돌아봤는데 박한섭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뒤이어 그가 다짜고짜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고 그 힘에 신채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너 RH 음성 혈액형이지?”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남자는 신채이를 끌고 채혈실로 향했다. “소은이가 교통사고로 피를 많이 흘렸어. 병원 혈액도 모자라서 그러니까 당장 피 좀 줘.” “나, 그게...” 신채이가 말문을 열려는 순간, 박한섭은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쥐며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 차가운 입맞춤은 스쳐 가는 듯하며 곧 끝이 났다. “이제 줄 수 있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냉담했다. 눈빛에서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신채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채혈실로 끌려 들어갔고 문 너머에서 간호사들의 수군거림이 생생히 들려왔다. “저 여자가 자살 시도만 108번 했다는 박 대표님 부인이래. 처음에는 키스 받으려고 자살했고 두 번째는 데이트, 세 번째는 같이 자려다가... 그런데 매번 거절당했대. 참, 낯짝도 두껍지.” “그런데 오늘은 박 대표님이 드디어 키스해줬잖아. 그것도 신소은 씨한테 줄 피 뽑으려고...” “지금쯤은 좋으면서도 아프지 않을까? 겨우 키스는 받았는데 그 이유가 다른 여자 때문이라니...” 신채이는 채혈 의자에 누운 채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박한섭이 신소은의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더니 그 하얀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신채이는 기쁘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바늘이 혈관에 들어가는 순간의 따끔함조차도 마치 천으로 덮인 듯 희미했고 그녀가 느꼈어야 할 그 참담한 감정들조차, 기억 상실과 함께 희석되어 버린 듯했다. 모든 걸 잊어버리는 건, 아마 신이 그녀에게 준 마지막 자비였는지도 몰랐다. 400cc 헌혈을 마친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바깥으로 나왔다. 눈앞이 핑 돌고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버틴 끝에, 그녀는 결국 박한섭 앞에 다가가 입을 열었다. “한섭 씨, 우리 집 주소 좀 알려줄래? 대신... 선물 하나 줄게.” 박한섭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또 뭔 짓을 꾸미려는 거야? 자살이나 하다 보니까 집이 어딘지도 까먹은 거야?” “아니야... 나 지금 기억을 잃어서 그래.” “문 앞에 운전기사 있어.” 박한섭이 그녀의 말을 딱 잘랐다. “그 사람한테 데려다 달라 그래.” “고마워.” 신채이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선물은 꼭 준비할게.” “필요 없어.” 박한섭의 말투는 얼음 같았다. “난 네가 주는 선물 같은 거에는 관심 없어. 내 비위 맞추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이에 신채이는 눈을 내리깔고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올렸다. ‘그래? 하지만 이번 선물은 당신이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차에 올라탄 그녀는 휴대폰 연락처에서 변호사의 번호를 찾아 메시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이혼과 친자 관계 해제를 원합니다. 이혼 협의서와 친권 포기 각서를 준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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