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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변호사의 답장은 금세 도착했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신채이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 신이 그녀에게 준 기회였다. 모든 끔찍한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오늘은 집에 안 갈 거예요.” 그녀가 갑자기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출입국사무소로 가주세요.” 운전기사는 눈에 띄게 놀란 표정으로 룸미러 너머의 그녀를 바라봤지만 곧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출입국사무소의 절차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는데 직원의 말에 따르면 필요한 모든 서류는 보름 뒤면 발급된다고 했다. 차에 오르며 신채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말을 꺼냈다. “오늘 있었던 일... 한섭 씨에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운전기사는 핸들을 쥔 손이 굳어지는 게 보일 정도로 움찔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는... 누구도 사모님 이야기를 그분 앞에서 꺼내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에 신채이는 힘없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날 그 정도로 싫어하는 건가? 내 이름조차 듣기 싫은 정도로?’ 별장에 도착했을 때, 신채이는 현관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 집은 낯익으면서도 낯설었다. 낯익은 건 모든 인테리어와 배치가 그녀의 취향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고 낯선 건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거의 없을 만큼 적막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파 위의 자수 쿠션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 집을 꾸밀 때의 나는 분명 이 공간에서 박한섭과 함께 웃고 지내길 기대했겠지.’ 벽에 걸린 웨딩사진 속, 신채이의 눈빛에는 애정이 가득했지만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냉정함만이 서려 있었다. 신채이는 고개를 저으며 계단을 올라갔다. 침실에 들어서자 습관처럼 서랍을 열었고 이내 피질 커버의 일기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첫 장을 펼치자 마치 술에 취해 쓴 듯 삐뚤삐뚤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나와 한섭 씨의 신혼 첫날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괜찮다, 난 기다릴 거니까.] 장을 넘길수록, 페이지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37번째 자살 시도... 그 사람은 여전히 오지 않았다. 비서는 신소은이 열이 나 한섭 씨가 그 아이의 곁을 밤새 지켰다고 말했다. 나는 응급실 침대에서 링거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89번째, 수면제를 삼켰다. 깨어났을 때, 그 사람은 복도에서 그냥 죽게 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이해했다. 죽음보다 더 아픈 건, 사랑하는 사람 입에서 내가 죽길 바란다는 말을 듣는 것이라는 걸.] [108번째.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그냥 사라지자... 어차피 나를 신경 쓰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으니까.] 가슴이 생으로 갈라지는 듯한 느낌에 신채이는 일기장을 힘껏 덮었다. 손목을 지나간 수많은 상처 자국이 갑자기 뜨거워졌고 그 흉터들로 인해 과거 느꼈을 절망감들이 울부짖듯 되살아났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꼭 안았다. 알고 보니 지난 3년 동안 신채이는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던 것이다. 꼬리를 흔들며 애원하는 강아지처럼, 박한섭의 눈길 하나 얻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짓밟았던 삶... “괜찮아.” 신채이는 눈물을 닦고 일기장을 서랍에 넣었다. “신채이, 아무도 널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창밖의 달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 그녀의 발끝 근처에 작은 빛 조각을 떨어뜨렸다. “네가 너 자신을 사랑하면... 그건 진 게 아니야.” 그렇게 별장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박한섭은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도 없고 사랑도 사라졌기에 그녀는 홀로 빈집을 지키는 게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시간이 흘러 이민 서류만 완성되면 그렇게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평온을 어지럽히는 전화가 걸려왔다. 김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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