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간호사는 무슨 말을 하려다 입만 달싹거리고 결국 조용히 병실을 나갔다.
잠시 적막이 흐르던 그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린 탓에 신채이는 손을 더듬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나이가 들었지만 기운 있는,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얘야, 할아버지다.”
신채이는 순간 멈칫했다.
일기장 속에 적힌, 박씨 가문에서 그녀에게 유일하게 따뜻했던 그 어른이었다.
“요즘 일 다 들었어.”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자애롭고 안쓰러워하는 듯한 기색이 가득했다.
“고생 많았다. 널 아내로 맞았으면 마땅히 널 잘 보살펴야 하는 건데... 걱정 마라. 할아버지가 네 편이 되어주마.”
기억을 잃은 뒤 처음으로 느껴지는 선명한 관심과 사랑이었다.
코끝이 시큰해지며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전 정말... 괜찮아요.”
“이놈의 계집애, 넌 왜 항상 할아버지 가슴만 아프게 하니?”
노인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어릴 때 납치돼 몇 년이나 고생했는데 네 친부모는 너한테 정 하나 안 주고 오히려 양딸을 챙긴다니... 한섭이도 마찬가지지.”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해졌다.
“네가 그동안 얼마나 헌신을 했어? 까다롭고 성질 까탈스러워도 네가 애써 전신 마사지 배워서 맞춰주고 걔가 좋아한다는 절판된 찻잔 세트 하나 구하려고 수십 개 도시를 돌아다니고 위출혈로 입원했을 때는 사흘 밤낮을 붙어 간호하고 걔 엄마 돌아가셨을 때는 네 손으로 장례 다 치러주고... 그런데도 녀석은 너한테 진심 한번을 내준 적이 없구나. 결국 후회하게 돼 있어.”
신채이는 멍하니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들인데 듣고만 있어도 가슴 깊은 곳이 저릿하게 아팠다.
“자, 할아버지는 검진받으러 가야겠구나.”
노인은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말했다.
“잊지 마라. 앞으로 일 있으면 무조건 할아버지한테 와. 할아버지가 네 등 뒤에 서 있을 테니까.”
전화를 끊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실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고 박한섭이 문가에 섰다.
정장 차림은 흐트러짐 하나 없고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앞에서는 알레르기 핑계로 자살 소동, 뒤에서는 할아버지한테 달려가 하소연... 신채이, 나 보는 방법이 자살 아니면 할아버지 뒤에 숨는 것밖에 없어?”
뭐라 해명하고 싶었으나 그의 비웃음 가득한 눈빛을 보자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나도 내가... 땅콩 알레르기 있는 걸 잊었어.”
“땅콩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잊었다고?”
그는 피식 냉소했다.
“차라리 네가 누구인지도 잊었다고 하지 그래?”
신채이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갈아 넣던 신채이도, 그 사랑이 산산조각 나며 남긴 절망도, 박한섭이 한 번만 바라봐주길 바라며 살아온 지난 시간도 모두 잊어버렸다.
아니, 잊지 않았다 해도 말할 의지 역시 없었다.
할아버지의 압박이 있었던 듯 박한섭은 마지못해 간병인 노릇을 했다.
하지만 그건 돌봄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잔혹함이었다.
링거에 역류가 생겨도 모른 척했고 뜨거운 물이 그녀의 손을 덮쳐도 꿈쩍하지 않았고 숨이 막혀 호출 벨을 눌러도 박한섭은 오직 전화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소은이 약 바꿔줬어? 그래, 가장 비싼 흉터 연고 보내.”
웃기는 건 이제 그를 사랑하지 않는데도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었다.
예전의 자신, 그토록 박한섭을 사랑했던 신채이, 그 여자는 대체 어떻게 매일같이 이런 고통 속에서 버텼을까?
창밖에서 오동잎 한 장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신채이는 일기장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문장이 떠올랐다.
[언젠가 내가 한섭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된다면... 그건 내 마음이 죽어버린 뒤일 거야.]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글을 쓰던 신채이는 이미 외롭고 차가운 수많은 밤 속에서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