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사모님, 신상부터 클래식한 디자인까지 다 보여드렸는데 아직도 마음에 드시는 게 없으세요?”
“...”
“사모님?”
송가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제일 가까이에 있는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거로 할게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본 직원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그녀의 구매로 주얼리 매장은 금세 활기를 되찾았다.
송가빈은 지난 3개월간 거의 매일 해당 주얼리 매장을 방문했다. 그래서인지 직원들은 그녀가 올 때마다 아부 섞인 멘트를 아낌없이 늘어놓았다.
“남편분께서 사모님을 엄청 사랑하시나 보네요. 남들은 1년에 한 번 살까 말까 망설이는 것들을 사모님은 바로 결제하시잖아요. 너무 부러워요.”
“저도 한 번쯤은 제가 원하는 걸 돈 걱정 없이 사보고 싶어요. 물론 그러려면 사모님 남편분 같은 훌륭한 사업가 남편을 만나야 할 테지만요.”
“다들 그러잖아요. 여자는 자기한테 충성하는 남편만 있으면 된다고. 사모님이 바로 인생 승자세요.”
송가빈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잔잔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직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해당 여직원은 직원들의 아부 행렬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숙련된 손길로 방금 송가빈이 구매한 목걸이를 상자에 담고 있을 뿐이었다.
길고 하얀 손 때문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여직원이었다.
송가빈은 자신이 꼭 스토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많고 많은 주얼리 매장 중에서 굳이 이 곳만 찾아오는 이유가 바로 그 여직원 때문이었으니까.
하긴, 일과 아내밖에 모르던 남편을 단 며칠 만에 꼬셔버렸으니 누구라도 궁금했을 것이다. 바람 상대가 누군지.
송가빈의 남편은 송가빈과의 15년이라는 시간을 가볍게 배신하고 두 사람이 했던 모든 약속을 다 깨버린 채 주얼리 매장의 여직원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여직원의 이름은 임수연, 미인이라고 칭송할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흔한 얼굴에 속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손만큼은 섬섬옥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길고 가늘었다. 여자도 홀릴 뻔한 손인데 남자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직원이 포장을 마친 것을 본 송가빈은 나가기 전,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직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뭐든지 말씀만 해주세요.”
송가빈은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더니 옆에 있던 직원에게 건넸다.
“이거, 녹여주세요.”
점원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이건 사모님 결혼반지잖아요. 여기 이니셜도 새겨져 있는데...”
[PDJ&SGB], 이건 송가빈과 그녀의 남편인 박동진의 이니셜로 박동진이 직접 반지에 새긴 것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담긴 반지인데 정말 녹이셔도 괜찮겠어요?”
직원이 확인차 물었다.
“네, 녹여주세요.”
송가빈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했다.
“가능한 한 빨리 부탁드릴게요.”
...
송가빈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마침 밖으로 나오던 박동진과 부딪히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송가빈의 몸이 뒤로 넘어가려는데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확 낚아채 넘어지지 않게 막아주었다.
박동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품 안에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왜 이제 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한층 덮어져 있었다.
“맞아요, 사모님. 8시가 넘어가려고 하는데도 아무런 연락도 없으셔서 대표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니까요.”
뒤늦게 나온 도우미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 옆에는 박동진의 비서인 하준우도 있었다. 하준우는 송가빈의 얼굴을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말을 건넸다.
“네, 형사님. 사모님께서 지금 막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박동진은 매의 눈으로 송가빈의 몸을 훑고는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안심한 듯 표정을 풀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다가 갑자기 또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이 왜 이렇게 차? 계속 밖에 있었어?”
송가빈은 그의 손을 밀어낸 후 안으로 들어갔다.
“집에만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잠깐 바람 좀 쐬러 나간 것뿐이야. 연락 못 했던 건 배터리가 다 돼서 그런 거고.”
박동진은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가며 자신의 외투를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꼭 안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요즘은 바람이 차.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해.”
송가빈은 그의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었기에 체념한 듯 가만히 안겨 있었다.
그녀가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박동진은 뒤따라온 아주머니를 바라보며 따뜻한 유자차를 만들어 오라고 했다.
그리고 금방 다시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하준우를 바라보았다.
“준우 너는 지금 당장 보은각으로 가서 가빈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포장해 와. 짜지 않게, 알지?”
“네, 대표님.”
거실에는 이제 박동진과 송가빈, 두 사람만 남았다.
박동진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감싼 채로 있었다.
“미안해. 아까는 내가 말이 세게 나갔어. 화 풀어.”
“나 화 안 났어.”
송가빈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요 며칠 쭉 기분이 별로였잖아.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기분이 별로였던 적도 없어.”
“가빈아, 내가 널 몰라? 우리가 알고 지내지만 벌써 15년이야. 네가 화났는지 아닌지, 기분이 별로인지 아닌지 정도는 눈에 선해. 이틀 동안 네가 화가 난 이유가 뭔지 줄곧 생각해 봤어. 하지만 내가 뭘 잘 못 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 그러니까 그냥 얘기해줘. 내가 고칠게. 응?”
송가빈은 고개를 들어 15년이나 사랑했던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분명히 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인데, 변한 게 있다면 단지 소년에서 남자가 되어 조금 더 진중해진 것뿐인데, 왜인지 그녀는 그가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오버하지 마. 생리 때문에 감정 기복이 불규칙적으로 변한 것뿐이니까.”
박동진이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송가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그것 때문이야?”
“응.”
박동진은 그녀의 답변에 곧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번 주는 재택근무만 할 테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하 비서한테 연락해서 집으로 보내.”
그의 말에 송가빈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너랑 같이 집에 있으려고.”
박동진이 전화를 끊으며 답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어?”
송가빈이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이렇게 자상한 남편이 내 남편인데 그럼 웃음이 안 나오고 배겨?”
박동진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가빈아, 속상하거나 기분이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우리는 부부잖아. 부부는 원래 숨기는 일 같은 거 없어야 해.”
“그럼 너는 나한테 얘기 안 한 거 없어?”
박동진은 이때다 싶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우리 결혼한 지도 벌써 3년이나 됐는데 슬슬 아이 가져볼까?”
송가빈은 그의 얼굴을 밀어내더니 대뜸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건넸다.
“읽어보고 사인해.”
박동진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바로 마지막 페이지로 넘어가 그의 이름 옆에 사인했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으며 송가빈에게 건넸다.
“자, 여기.”
“이게 뭔지 궁금하지도 않아?”
“네가 원하는 건 그게 뭐든 나는 다 줄 거야. 네가 출산하고 육아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거 알아. 만약 이 서류가 너한테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나는 몇 번이고 더 사인할 수 있어.”
“박동진, 일단 한번 보고...”
그때 휴대폰 진동음이 울렸다.
박동진은 메시지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손을 놀리며 답장했다.
답장을 마친 뒤에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빈아, 나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그래.”
박동진이 밖으로 나간 후 송가빈도 자리에서 일어나 차고로 향했다.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켜보니 차량 디스플레이가 켜지며 박동진의 카톡 화면이 튀어나왔다.
[연이: 내가 전에 얘기했던 그 사모님 기억해? 그 사모님이 오늘 또 방문해 주셨어! 이번 달에도 그 사모님 덕분에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너무 좋아.]
[박동진: 그렇게 좋아?]
[연이: 당연하지. 나는 그 사모님이 오기만 기다린다니까? 돈 많은 사모님들은 사랑이야!]
[박동진: 나도 전에 일주일 내내 매장에 가서 목걸이 사줬는데 왜 나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안 해줘?]
[연이: 으이구, 너랑 사모님이랑 같아? 사모님은 내 마음속의 VVVVIP라고.]
[박동진: 그럼 나는?]
[연이: 일단은 내 후궁 정도로 해줄게.]
[박동진: 나는 대체 언제 정실이 될 수 있는 거야? 내가 얼마나 너를 더 사랑해야 정실 시켜줄래?]
[연이: 하하하, 질투하는 거 귀여우니까 애첩으로 승격시켜 줄게. 우리 통화할까? 계속 문자만 하니까 손 아파.]
[박동진: 그래.]
송가빈은 [연이]라는 이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임수연이라는 이름의 여직원과 그녀의 섬섬옥수 같던 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잠시 후, 시동을 끄고 집으로 돌아온 송가빈은 곧장 소파로 향했다. 박동진이 사인했던 서류가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원래 자리에 놓여있었다.
송가빈은 서류를 챙겨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녀가 박동진에게 건넨 서류는 다름 아닌 이혼합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