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홍서윤은 방 안의 불을 켰다.
빛이 번쩍이며 켜지자 최태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침대 머리맡에 있는 여자를 확인했고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하지만 연약하고 무력한 홍서윤을 보자 잠시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까만 긴 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고 몸매를 드러내는 긴 드레스가 홍서윤의 선을 부드럽게 그려냈다. 불빛이 내려앉자 창백한 뺨 위에 피 묻은 붉은 입술이 대비되어 요염하면서도 청순하여 놀라울 만큼 아름다웠다.
최태준의 눈빛이 어두워지고 관자놀이에는 핏줄이 불끈 튀어나왔다. 손을 들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며 홍서윤이 이곳에 나타난 목적을 떠올렸다.
“홍서윤, 또 이런 수작이냐? 아직도 그런 마음 품고 있는 거냐고.”
말을 마친 최태준은 홍서윤의 팔을 꽉 잡으며 밖으로 끌어냈다.
문밖에서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자 홍서윤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고 공포가 한없이 부풀어 올라 문고리를 꼭 잡으며 눈물을 쏟아냈다.
“아저씨, 전 아저씨가 올 줄은 몰랐어요. 제발 안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제가 다 설명할게요, 네?”
최태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홍서윤의 손가락을 하나씩 떼어냈고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버렸다. 홍서윤이 아무리 두드려도 굳게 닫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홍서윤은 문에 몸을 기대다 힘없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천둥은 요란하게 울리고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두 귀를 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계속 아빠와 엄마를 불렀다.
“아빠, 엄마...저 정말 너무 무서워요...”
“보고 싶어요...아빠...엄마...”
자신을 보물처럼 아껴주던 아저씨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정말로 혼자가 되어버렸다.
...
홍서윤은 감기에 걸렸지만 준비해야 할 일은 계속 준비했다. 돈은 거의 모였고 이제 그녀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다음 주는 최태준의 약혼식이었고 홍서윤은 대충 시간을 계산해 보니 충분한 것 같았다.
그간 거둬준 정이 있었던지라 약혼식에 참석해야 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홍서윤과 최태준이 다시 마주친 건 사흘 뒤였다. 최씨 가문에 와서 짐을 챙기다가 최태준과 마주치게 되었다.
홍서윤은 짐을 챙기고 담담하게 그를 부른 뒤 떠나려 했다. 그러나 최태준이 홍서윤의 앞을 막아서며 다소 복잡한 눈빛으로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미안했어.”
그날 일을 언급하자 홍서윤은 어깨를 흠칫 떨었지만 다시 평정을 되찾고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이미 다 지난 일이잖아요.”
그대 최태준은 홍서윤 손목의 검은 끈을 발견하고서는 미간을 구겼다. 안쓰럽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고.
그는 알고 있었다. 일부 젊은 커플들이 이런 끈 같은 팔찌를 맞춰 차는 게 유행이라는 것을. 홍서윤에게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걸 떠올리자 표정이 썩 좋지 않아졌다.
“남자친구 생겼니?”
홍서윤은 어리둥절해 고개를 저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아직 네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네. 나도 가봐야겠어.”
최태준은 그녀에게 거절을 허락하지 않았던지라 홍서윤은 하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임시로 지내고 있는 집으로 갔다. 문을 열자 책상 위에 있던 유학 서류가 그대로 놓여 있었고 최태준도 그것을 발견했다.
홍서윤은 최태준과 유아람의 약혼식에 참석했지만 비자를 찾으러 가느라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녀는 일주일 전 최태준이 책상 위에 올려둔 유학 서류를 보았던 일을 떠올랐다. 다행히 서명하기 전이었던지라 그녀는 친구의 것이라고 둘러댔고 최태준도 더 캐묻지 않았다.
다만 최태준은 그녀에게 굳이 서둘러 연애할 필요가 없으니 아직 젊을 때 일에 집중하라고만 말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었던지라 홍서윤은 그의 속내를 할 수 없었고 들을 생각도 없었다.
약혼식 날 홍서윤은 테이블에 앉아 그들이 호흡을 맞춰 잔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인파 속을 오가며 유아람의 눈빛에서는 넘쳐흐를 듯한 행복이 가득했다.
홍서윤은 최태준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렇게 거리낌 없이 그를 바라볼 수 있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최태준을 좋아해 온 그녀는 늘 상상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고 드레스도 오직 그만을 위해 입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제 홍서윤은 더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입을 맞췄고 홍서윤은 그 틈에 떠나려 했다. 그러나 호텔 중앙의 스크린에서 낯선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홍서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그녀가 최태준에게 고백하던 날의 장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찍혀 재생되고 있었고 주위에서는 이미 수군거리며 그녀를 욕하기 시작했다.
뻔뻔하다는 둥, 미운 오리 새끼 주제에 백조의 자리를 탐내려 한다는 둥,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모도 없는 주제에 염치도 모르고 불륜녀가 되려 한다고 손가락질도 했다.
...
홍서윤의 손끝이 덜덜 떨려오며 최태준을 보았다. 최태준이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태준은 마이크를 집어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부터 홍서윤은 최씨 가문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영상에 대해 해명은 하지 않은 채 무자비하게 이 말을 내뱉었다. 홍서윤은 순식간에 명예를 잃었을 뿐 아니라 최씨 가문의 보호도 잃었다.
참 아이러니했다. 언젠가는 자신을 지켜주고 절대 상처받지 않게 하겠다던 그 사람이 지금은 그녀를 여론의 도마 위로 밀어 올려 욕을 먹게 했으니까.
어떤 것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법이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담담히 모든 것을 받아들인 그녀는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이제 출국하면 최씨 가문과 얽힐 일도 없을 거고 무슨 욕을 하든 상관없었다. 그의 말대로 이제 그녀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홍서윤이 떠나려 하자 유아람의 친구들이 홍서윤을 막아서며 영상에 관해 설명하라고 했다.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길을 막고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무표정한 얼굴로 올라가 마이크를 집어 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인정합니다. 저는 최태준 씨, 그러니까 아저씨를 좋아했었습니다.”
최태준은 홍서윤의 얼굴이 뚫릴 듯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