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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추석날. 나는 배승훈이 좋아하는 음식들로 한 상 가득 차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약속을 어겼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나는 익숙한 듯 그의 첫사랑 여신의 SNS를 열어보았다. [아주 칭찬해. 전구 나갔다는 이 한마디에 여친 버려두고 달려왔네.] [사랑보다 우정이 먼저인 귀한 성품, 계속 유지해줘.] 함께 올린 사진에는 배승훈이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전구를 갈고 있었고, 그녀는 두 손으로 배승훈의 다리를 붙잡았다. 심지어 무심코 얼굴을 배승훈의 민감 부위에 스쳤지만, 이 남자는 피하지 않고 입가에 옅은 미소까지 번졌다. 말 그대로 초토화 광경이지만 나는 더 이상 마음이 무너지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좋아요]를 누르고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다만 배승훈은 전혀 믿지 않았다. “별거 아니야. 그냥 삐진 거지. 며칠 내버려 뒀다가 몇 마디 달래면 금방 화 풀려.” 어리석은 남자는 전혀 모르겠지. 전에 내가 그토록 쉽게 길들여졌던 이유는 오롯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란 걸. ‘배승훈, 이제 더는 날 길들일 생각 마.’ ...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냈지만, 바닷속 깊이 가라앉은 건지 답장이 오지 않았다. 대신 윤서아가 영상 하나를 보내왔다. 시끌벅적한 룸 안에서 배승훈의 친구들이 왁자지껄 웃고 있었다. “야, 이가영 너 7년이나 쫓아다니더니 먼저 헤어지자고 했다고? 설마 이번엔 찐이야?” 배승훈은 망고 케이크를 자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냥 삐진 거야. 나랑 같이 있어 달라고 떼쓰는 거지.” “원래 전구 갈고 바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얘가 이렇게 나오니 안 되겠다. 이럴 때 봐주면 버릇 나빠져.” “며칠 내버려 둬야 정신을 차리지.” 이어서 그는 케이크를 윤서아의 입에 가져다 댔다. “욘스 신제품이야. 한입 먹어봐.” 친구들은 눈짓을 주고받으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어차피 이가영 대체품이었잖아. 이참에 차라리 헤어져.” “이제 찐 사랑도 돌아왔겠다, 두 사람 제대로 만나보는 건 어때?” “그래, 서아야. 승훈이 몇 년 동안 네 생각밖에 안 했어.” 배승훈은 아무 말 없이 뜨거운 눈길로 윤서아를 쳐다봤다. “다들 뭐래? 나랑 승훈이 그냥 친구야. 순수한 우정이라고.” 그녀는 놀란 기색을 내비치며 앙증맞게 배승훈의 팔을 툭 쳤다. “얼른 네 여친 달래러 가봐. 안 그러면 나 진짜 누명 벗기도 힘들겠다.” 배승훈의 눈빛이 희미하게 어두워졌다. 그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어둠이 깃들었다. “걱정 마. 내가 몇 마디 달래면 금방 풀려.” 나는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았다. 이제 단념하기로 했는데 가슴 한구석이 여전히 너무 시큰거렸다. 나의 20대를 장식한 이 남자, 첫눈에 반해 7년을 사랑한 사람이니까. 대학 1학년 추석, 내가 먼저 그에게 고백했다. 캠퍼스 공식 미남인 배승훈은 차도남 기질이라 수많은 여학생들의 고백을 가차 없이 거절했다. 하여 나도 그저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고백을 시도했을 뿐이다. 하지만 달빛 아래, 배승훈은 내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야, 고백은 내가 해야지.”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그 순간의 떨림과 아련함은 영원히 마음속에 간직되는 줄 알았다. 배승훈이 내게 처음 키스하던 날,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서아야’라고 불렀다. 그때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냉전을 겪은 날이었다. 3일 뒤, 배승훈은 작은 케이크를 들고 와 나를 달랬다. “전에 짝사랑했던 여자애일 뿐이야. 신경 안 써도 돼.” 그의 눈가에 드리운 다크서클을 보며 나는 결국 마음 약해져서 다시 화해했다. 그때 나는 윤서아가 우리 사이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거라고 자신 있게 믿었다. 그녀는 단지 배승훈이 소싯적 얻지 못한 첫사랑일 뿐, 시작조차 못 한 과거라고 여겼다. 나야말로 그의 여자친구이니 이 남자의 현재이자 미래였다. 대학 4년 동안 나는 진심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졸업 후에는 가족들과 인연까지 끊을 각오로 그를 따라 낯선 도시에 왔다. 그 역시 나에게 잘해주었다. 케이크 맛집 욘스에서 신제품이 나오면 배승훈은 항상 제일 먼저 내게 사다 주었다. 자상하게 나의 긴 생머리를 말려주었고, 생리 때면 밤새 배를 문질러주었다. 화려한 말은 없지만,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순간들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나는 우리가 CC에서 결혼까지, 그리고 평생을 함께할 거로 믿었다. 반년 전, 윤서아가 귀국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태연하게 내뱉은 그 한마디. “너 진짜 나랑 닮은 여자친구 찾았구나.” 그 잔인한 한마디가 나를 산산조각 냈다. 배승훈의 적극적인 고백은 과거 윤서아가 자신을 받아주지 않았던 아쉬움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고, 매번 빼놓지 않고 사 주던 케이크도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나에게 보여주었던 모든 배려는 그녀가 바라는 미래 남자친구의 모습이었다. 배승훈은 단지 나라는 ‘대체품’을 이용해 외로움을 달랬고, 윤서아가 바라는 남자친구의 모습으로 거듭나려 했다. 나는 문득 그의 옛 약속들이 떠올랐다. “가영아, 우리 사귄 지 7주년 되는 날에 결혼하자.” “너는 나 때문에 가족을 등지고 이 먼 곳까지 따라왔으니 앞으로 매년 추석은 꼭 너와 함께 보낼 거야.” 이번 추석이 바로 우리의 7주년 기념일이었다. 하지만 배승훈 이 인간은 감쪽같이 잊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잊어. 나도 이만 집에 돌아가서 가족들이 정해준 정략결혼 상대를 만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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