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어느덧 자정이 넘었지만, 배승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나는 밤새워 뒤척이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은 의외로 잠이 잘 왔다.
아마도 더 이상 가치 없는 사람을 놓아주며 나 자신도 놓아줘서겠지.
이른 아침, 나는 부엌의 인기척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배승훈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리고 균형 잡힌 탄탄한 팔뚝을 드러낸 채 웍을 돌리면서 어젯밤의 음식들을 전부 데우고 있었다.
“오늘은 가영이랑 함께 추석 보내야지.”
그는 웍을 든 채로 그 안의 탕수육 한 조각을 맛보았다.
“솜씨 좋네.”
나는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배승훈은 늘 깔끔함을 중요시하며 절대 남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그런 그가 시선을 내리고 나의 반응을 기다렸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토록 예외적인 행동은 사실 나를 달래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그는 지금 내가 한발 물러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에는 당연히 잘만 통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됐어.”
추석을 다시 쇠는 것도, 나를 달래는 것도 다 부질없는 노릇이다.
배승훈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곧장 돌아서서 케이크 한 조각을 꺼내더니 무심코 내 앞으로 내밀었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욘스 신제품이야.”
자르고 남은 케이크, 망고가 잔뜩 뒤덮인 케이크, 순간 나는 심장을 쿡 찌르듯 아팠다.
사실 나는 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정 나를 달콤하게 했던 것은 이 남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7년 동안 배승훈은 윤서아의 모든 취향과 입맛을 줄줄 꿰매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망고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침묵하면서 지난 7년이 얼마나 헛된 시간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편 배승훈의 눈가에 서서히 짜증이 차올랐고 억지로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적당히 해. 내가 많이 낮춰줬잖아. 언제까지 투정 부릴 거야?”
“서아만 권고하지 않았어도 나 이렇게 빨리 안 왔어! 삐진 거 달래주려고 왔더니 애가 점점 기어오르려 하네?”
“두 번 다시 헤어지잔 말 하지 마. 알았지?”
그랬구나.
날 달래러 오는 것조차 윤서아 때문이었구나.
“승훈아, 나 진심이야.”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제 진짜 너랑...”
‘헤어지고 돌아가서 정략결혼 해야 해...’
하지만 그의 전용 벨 소리가 뒤따라오는 말을 끊어버렸다.
“그래, 서아야.”
배승훈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온화해졌고 눈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지금 갈게.”
전화를 끊은 후 그의 표정이 다시 차갑게 굳었다.
“서아가 불러서 잠깐 다녀올게.”
늘 그렇듯 내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성큼성큼 떠나가는 이 남자.
다만 이번에 나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지 않았다.
연휴 동안 시간이 남아돌아 이참에 회사에 들렀다.
명절이 지나고 사표를 내면 나는 곧 이곳을 떠난다.
미리 문서를 정리해두면 나중에 인수인계하기도 편할 것이다.
저녁이 되어서야 나는 회사에서 나와 근처의 유명 맛집으로 향했다.
음식 맛은 물론이고, 이곳에서 커플 사진을 찍으면 결혼에 골인할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몇 번이고 배승훈과 함께 가고 있었으나 그가 번번이 일이 있다며 약속을 미뤘다.
이제 이 도시를 떠나기 직전, 나는 혼자 맛집을 탐방하기로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배승훈과 윤서아가 한눈에 들어왔다.
둘은 나란히,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식탁 위에는 죄다 배승훈이 먹지 못하지만 윤서아가 좋아하는 음식들로 가득 찼다.
배승훈은 매운 걸 못 먹고, 해산물도 좋아하지 않는다. 여태껏 내가 그에게 맞춰주었다.
그런 배승훈에게도 맞춰주고 싶은 사람이 따로 있었구나.
두 남녀는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윤서아가 웃으며 한입 베어 문 핫치킨을 그의 입에 쑤셔 넣었다.
“맛있어. 반 나눠줄게.”
손가락이 무심코 그의 입가를 스쳤다.
이에 배승훈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졌다.
내 기억 속 이 남자는 언제나 침착하고 절제하는 사람이었는데 25살의 나이에도 사춘기 소년처럼 수줍은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이런 표정도 가능한 거였구나.
“서아야, 우리 같이 사진 찍을까?”
배승훈이 무심한 척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긴장감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윤서아는 아무 대답 없이 웃으면서 그를 밀치더니 갑자기 머리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